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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남성·엘리트 너머의 지역사
항일·남성·엘리트 너머의 지역사
  • 강성호
  • 승인 2022.08.24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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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강성호 전남대학교 호남학과 박사과정 
강성호 전남대학교 호남학과 박사과정 

가끔씩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난감하다. 음악을 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이사가 잦아서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만 해도 5번이나 전학을 다녔다. 1년에 1번씩 전학을 간 셈이다. 그나마 중고등학교 시절을 경북 포항에서 지낸 탓에 ‘철강의 도시’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지만 찜찜한 건 여전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포항에서 지낸 시간은 거의 없는 편이니까. 드문드문 포항이 궁금할 때가 있지만 막상 고향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애매하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애초에 고향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선뜻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의 ‘고향 없음’을 고백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고향이 나의 주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석사과정으로 역사학(한국 현대사)을 공부했다가 박사과정으로 지역학(호남학)을 연구 중이다. 배운 바탕이 역사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역사(local history)에 눈길이 갔다. 순천에 10여 년 동안 지내면서 지역사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중앙 위주의 역사학이 뭔가 생경하고 잘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 내가 애정하는 골목길의 80여 년 전 사진을 우연찮게 보고 지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골목길의 모습이 지금과 거의 같은 걸 보고 역사가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골목길의 역사성을 두 눈으로 목도하면서 지역사 연구의 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연구자로서 선행 연구 검토는 필수.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그런데 기존의 지역사는 향토애를 고취하기 위한 서사로 가득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장이거나 3·1운동 때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열사만이 향토사의 주인공이었다. 심지어 이 분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매우 피상적이었다. 너무 뻔한 지역사 연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의 연구 동력도 지역에 대한 애정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새로운 지역사 연구는 항일-남성-엘리트 위주의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눈길이 간 키워드가 ‘고향’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순천은 여순사건이 벌어진 주요 현장 중 하나였다. 지역에서는 ‘반란의 고장’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념대립의 와중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다. 소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온 국군은 적의 보급로를 끊고자 소개(疏開) 작전을 시행했다. 단지 ‘반란군’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누군가는 새로 이주한 곳에 정착했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한 세대쯤 지나서 이제 조금 살만해졌는데, 다목적 댐을 만들어야 하니 고향을 떠나달라는 통보가 날아왔다. 불과 40여 년의 시간을 두고 여순사건과 수몰의 역사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정주가 아니라 이주의 관점으로 봐야 포착할 수 있는 주제들이 있다. 이를테면, 1990년대 초중반에 순천의 한 음성 한센인 정착촌은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쫓겨나 버렸다. 추방 이후 이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근대 신문 기사를 살펴보니 순천은 인신매매 문제가 성행한 곳이었다. 특히 생활권을 공유하는 구례의 여성들이 순천으로 많이 팔려온 모양이다.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에서 가진 건 자기 몸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운명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만주로 이주한 그 많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는 주제들을 모아보니 나는 실향의 (지)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평생 고향의 부재를 느끼며 지내온 탓에 고향을 상실한 이들의 이야기에 눈길이 간 모양이다. 

실향의 역사라고 하니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나중에 감당이 될까 싶기도 하다. 변덕이 죽 끓듯 요동쳐서 조만간 다른 주제로 갈아탈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떠남으로써 경계를 넘나들었던 사람들의 역사를 발굴하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어 보고자 한다. 재수가 좋으면 저 멀리 프랑스 파리로 가서 재불호남향우회에 대해 연구할지도 모르겠다. 이주의 관점에서 지역사를 조망한다는 건 지역학 연구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자면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 할 텐데. 몸이 무겁다는 이유로, 아니면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본다. 

강성호 전남대학교 호남학과 박사과정 

석사 졸업 후 돌고 돌아 지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독서 문화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2021년에는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오월의봄)이라는 책을 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포항-울산-서울-순천을 전전한 덕분인지 디아스포라, 실향, 트랜스 로컬리티 등에 눈길을 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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