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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르포 문학의 재현… 0.8평의 달방 체험기
따뜻한 르포 문학의 재현… 0.8평의 달방 체험기
  • 김흥현
  • 승인 2023.12.08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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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 너머를 읽다_『인간의 시간: 여인숙 달방 367일』 이강산 지음 | 눈빛 | 320쪽

인간의 시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생존 권리
위장된 세계에 대항하는 문학의 정치적 분투

다큐멘터리 일기에 담은 사진과 삶의 이야기 

사진(photography)은 빛의 그림이다. 이미지 미학이다. 작가는 빛의 있고 없음으로 이 세계에 대한 자기 철학을 표현한다. 이를 반영하듯,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사진의 사회 관계적 관점을 이렇게 말했다. “사진에 찍히는 현실은 눈이 보는 현실과 다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실에는 눈이 볼 수 없는 층위들, 곧 사진이 없으면 지각될 수 없는 층위들이 있다.”<『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On Photography』 (서울:위즈덤하우스, 2018), 27쪽.> 

사진예술가 이강산(1959~)은 이 설명들에 잘 어울린다. 그는 이전에 흑백사진으로 『집』(사진예술, 2017)과 『여인숙』(눈빛, 2021)을 담아 전시한 적이 있다. 그때 작가는 어둠과 밝음의 대비를 통해 죽어가는 것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사회 속에서 스러져가는 사물들에 스며있는 생존의 층위를 보여주었다. 그의 사진 속에서 죽어가는 사물은 소생했다.

최근 그는 자기 사진에 스며있는 이야기를 톺아내어 ‘다큐 일기’라는 부제를 붙여 출간했다. ‘다큐 일기’라는 제목이 말하듯, 그의 책은 이전에 출간된 두 권의 사진집과 연속되면서도 새로운 특징이 뚜렷하다. 하나는 ‘다큐’라는 것이다. 저자는 여인숙 사람들의 삶에 직접 들어가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기’라는 것이다. 일기는 대체로 개인의 비밀스러운 기록이지만 이 책은 공적 담론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2020년 7월 9일(목)부터 2021년 7월 10일(일)까지 대전역 근처 대덕여인숙에 머물러 달방 생활을 했다. 그때 그곳 사람들과 살았던 경험을 담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의 장르는 전형적인 일기(日記)문학이다. 일기는 본래 개인의 감춰진 기록을 의미한다. 지극히 자기 내면적이며, 사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기감정을 감춰둔 보고처럼 남겨진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은밀한 개인의 기록을 공개했다. 이 점에서 은밀한 일기의 성격을 벗어난다. 이 책을 ‘다큐 일기’라는 부제를 달아둔 것도 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기록이면서 자신이 경험한 공적인 삶을 보고하고 보도하는 기능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가 ‘여인숙’을 주제로 시도한 ‘인간의 생존 공간 탐구’에 연속된 결과물이다. 

이 책에 앞서 저자는 2007년 포항 구룡포에 있는 ‘매월여인숙’ 촬영을 시작했다. 그 이후 대전에 있는 ‘대덕여인숙’도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토대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 사진 전시회를 위한 작업 노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본능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이 말을 종종 되새긴다. 

이 여인숙들은 대부분 이미 철거되었거나 철거 예정지로서 머지않아 사라질 낙후된 건축물이다. 나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특히 주목했다. 여인숙 실내외 풍경보다 여인숙을 생존의 공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틈틈이 여인숙에 달방을 얻어 생활했다. 그것은 여인숙 사람들을 필름에 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의식주를 해결하지 않고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진가의 눈은 소외된 곳의 진실을 찾는 눈이어야 한다.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는 일에 미친다는 것은 나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삶이 극한에 이를수록 극명해진다는 진실을 발견했다. 그 진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처연한 사투이면서 동시에 공존을 위한 아름다운 동행이기도 하다.

이강산의 이 말들은 땅바닥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담겨있는 삶의 진실을 자기 몸으로 확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몸의 증거는 우리 삶 어딘가에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춰져 있는 삶의 여백을 직접 찾아 꺼냈다는 것을 함의한다. 특히 사진은 개인 경험을 사회 이슈와 연관 짓는 경첩 기제(hinge mechanism)로 작동한다. 

한 평짜리 ‘집’에서 폭염과 한파와 빈곤 함정에 파묻힌 채 없는 듯, 죽은 듯 살아가는 달방 사람들, 시한폭탄 같은 소요와 폭력적 갈등을 제거하고 마지막 불씨처럼 꺼져가는 인간의 말과 체온 회복이 절실했다. 사진을 인화해서 나눠주면 부지불식 간에 의식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252쪽).

이처럼 사진과 글로 구성된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장이 이어져 있다. 여인숙 사람들과 함께 저자가 살아냈던 367일, 여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다섯 계절에 걸쳐 관찰하고 경험한 에피소드들이 담겨있다. 자신이 직접 ‘여인숙’에 달방을 얻어 스스로 이방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손닿을 자리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함께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공존과 공재(共在)가 그의 목적이었다.

여인숙 밖의 세상으로 두고 볼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2년 남짓한 시간에 철거 직전의 여인숙 두 곳에서 열대여섯 사람의 삶과 죽음이 교차했으니, 2년이란 실로 장대한 ‘인간의 시간 아닐 수 없다...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역설적 인간의 시간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공간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한 평 남짓한 시공간에서 800여 일을 살아낸 이 기록을 나는 오늘 조심스럽게 여인숙 밖 세상으로 전한다. 당연하게 이 모든 것은 진실이다(『인간의 시간』, 313-314).


그런데 이 말을 들어보면, 저자가 염두에 둔 ‘인간의 시간’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죽음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인숙에서 체화하는 모든 삶을 ‘인간의 시간’이라 부른다. 

이 ‘인간의 시간’은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한편으로 ‘여인숙’에 머무는 인간이 ‘짐승’처럼 다뤄지는 시간이다. 저자는 이 시간 안에서 겪는 삶을 우회적으로 고발한다. 이를 통해 ‘짐승의 시간’처럼 방치되는 인간의 시간, 즉 인권 붕괴에 항변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시간’은 생존의 시간이다. 즉 오늘날 사회적 퇴물이며, 혐오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여인숙’ 안에 머무는 사람들 속에 상호 간 흐르는 환대와 사랑의 시간이다. 인권의 시간인 것이다. 저자는 이 개념을 활용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저 권리마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탈취당한 땅의 사람들을 변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이라는 말 속에서 이강산의 의의도 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의 시간처럼 보이지만, 생존의 시간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다큐와 이미지로 인간의 온화한 감성을 추적하는 르뽀 문학(reportage르뽀루타주의)을 재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따뜻한 르뽀다. 

이처럼 저자는 자신이 남긴 보고서 같은 일기를 통해 여인숙 밖의 사람들을 환대와 공존의 장으로 초대한다. 단지 ‘여인숙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를 항변하는 것이 아니다. ‘여인숙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시간이 살아있다’라는 것을 호소한다. 이 죽음의 공간에도 생(生)의 시간은 흐른다고 외친다. 생동하는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다. 여인숙 사람들의 삶은 ‘사람다운’ 이야기며, 그들의 관계는 샬롬(평화)이라고 웅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 계곡 같은 공간을 지배하는 짐승의 시간에서 인간의 생존 시간을 쟁취하여 재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적 정의와 사진예술의 연동

이 책의 주된 서술공간은 대전역 근처 재개발을 앞둔 이 층 짜리 대덕여인숙이다. 생각해보면, 여인숙(旅人宿)은 방향 없이 길을 오가야만 하는 나그네들에게 하루 저녁, 또는 짧은 기간 방을 내어주던 피난처였다. 길을 걷는 이들이 해 저물어 더 오갈 수 없을 때 누구나 자기 몸 하나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평안한 쉼터였다. 사회적으로는 근대문명이 농촌과 도시를 뒤섞어버리던 시절, 여인숙은 자기 터전을 떠나 타지에 머물러 방황하듯 떠돌던 이들을 위한 안식 공간이었다.

하지만, 여인숙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갔다. 문명이 발전하고, 삶의 공간이 화려하게 변모하는 동안 여인숙은 퇴락의 길로 밀려났다. 여인숙은 추락하는 사람들만 차가운 방바닥에 겨우 몸을 눕혀 땅바닥에 닿을듯한 자세로 웅크리며 삶을 버텨내야 하는 막장이다. 떨어지는 자기 삶을 잠시 걸쳐두는 정도로 비참한 시공간이다. 이 시공간에는 죽음 앞에서 잠시 불안한 눈빛으로 레테의 나루터에 삶의 짐을 내려둔 채로 자신을 내버려 두듯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겨우 살아있다.

그들은 떠나야 할 새로운 길이 없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회의 모든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비켜난 스올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여인숙은 고대 사람들의 상상 속 죽음 공간인 스올(Sheol, 하데스)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고대 지혜자 코헬렛이 말한 대로 이 스올은 더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곳”(Qoheleth 9:10)이다. 스올은 죽음의 빛이 밀려드는 생의 종점인 것이다. 여인숙 안과 밖은 문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늘과 땅만큼이나 삶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탄식하는 것은 단지 여인숙의 몰락이 아니다. 해 저물어 어두운 길, 그 밤을 잘 보내고 다시 내일 아침 새로운 기분으로 떠날 희망을 스스로 상실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이 죽음 계곡 같은 ‘여인숙’에서 오히려 생(生)의 희망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삶의 생기가 흐르는 낙원의 물줄기를 찾아냈다. 여인숙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코이노니아(koinonia, 관계)를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조명했다. 폐광 같은 여인숙에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의 권리와 끊어낼 수 없는 관계의 끈적함을 자기 몸으로 발굴해냈다. 그리하여 인간 생존은 이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짙은 감성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저자는 박물관에 수장될 여인숙 풍경을 인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이 죽음의 계곡 속에서도 유연하게 흐르고 있다는 빙거를 천하에 공개했다. 저자는 스스로 몸 하나 눕히면 꽉 차버릴 0.8평 공간에 자기를 밀어 넣는 방법을 선택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여름부터 숨마저 얼어버려 굳어버릴 것 같은 겨울까지 그리고 다시 다시 여름으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삶에 뿌리를 내린 생기를 경험했다. 저자는 그 여인숙 사람들과 함께 발견한 ‘인간의 시간’을 사진에 담았고 글로 남겼다. 인간다움의 증거를 채록하여 세상에 알렸다. 

무엇보다 이강산의 책은 사진과 글을 통해 인간 사이에 흐르는 정의를 구현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미국 법철학자)이 주장하는 시(詩)적 정의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종종 둔감하고 무딘 상상력을 가진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사고나 감성 속에서나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만드는 그 능력에 있다. <“민주적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황은덕 역)「오늘의 문예비평」(2010. 11), 45.>

누스바움은 이 말에서 정치와 법으로만 통치되는 이 세계에서 '공감의 철학'이 곧 문학의 정치적 실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강산 작업 역시 미생(微生)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며 그 ‘땅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정의에 대한 해석이라 평할 수 있다. 이강산의 책은 그에 대한 한 증거다. 이강산의 책은 죽음 같은 땅의 삶 너머에 자리한 생의 여백을 탐색한다.

또한, 이강산의 책은 문학이라는 비폭력의 힘을 통해 이 세계가 안전한 지대, 생의 여백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이는 『비폭력의 힘 The Force of Nonviolence』<김정아 역, (파주:문학동네, 2021), 91.>을 쓴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체험적 증언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책 2장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에서 “우리 중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왜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 안에 내재된 근원적인 의미와 그에 대한 가능한 답을 위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즉 “생명으로 셈해지는 생명은 누구의 생명인가? 라는 질문은 동어반복처럼 들리지만, 어떤 조건하에서는 이 질문이 의미가 있다. 생명으로 셈해지지 않는 생명이어도, 생명은 여전히 생명이 아닌가?”(93쪽) 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버틀러는 자신의 질문과 자신의 답으로서 새로운 질문을 시도한다. 즉 이 세계에 공존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라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하고,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들이라도 삶이 보호되는 안전한 지대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인간의 구원에는 여백과 생존 공간의 확보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명을 위한 비폭력의 힘이 사진가 이강산의 ‘사람들의 여인숙’과 시인 고정희 ‘여백’에서 함께 반영되어있다. 여인숙의 0.8평의 방과 고정희의 여백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공간이며 죽음 너머 생의 유지를 위해 확보되어야 하는 절대 공간이다. 아쉽게도 이강산의 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인숙에는 날마다 폭력이 일어난다. 고정희가 경험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날마다 죽음이 위협한다. 그런데도 이 폭력과 죽음의 공간에서 여전히 비폭력에 의한 생존의 여백이 살아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이 여백은 희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치 죽어버린 것들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듯’ 피어나는 생을 노래하는 안전한 지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텀블럭 사이트에 올라온 '이강산 휴먼다큐멘터리 사진집 [여인숙]' 사진=https://www.tumblbug.com/lyb5929/community/creator

죽음 너머 남겨진 여백을 응시하는 정의로운 시철학  

생의 ‘여백’이라는 관점은 요절한 시인 고정희(1948-1991)가 노래한 시에 명백하게 담겨있다. 시인 고정희는 시문학에 근거한 시인이며 신학자(神學者)다. 그는 문학/시로써 자기 철학과 신학을 발현하기 위해 온몸을 땅의 사람들에게 기투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시를 쓰며 자기 몸으로 체현하며 한국 여성문화 운동에 뛰어든 실천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시는 단순한 문학이 아니다. 이 굴곡진 세계에서 신학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실현하는 종교적 저항이었다. 어두운 세계를 균열시키는 견실한 광기(光器)였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운명의 시간이 그를 급습했다. 그는 이 땅을 떠났다. 하지만, 그 뒤에 오히려 그의 시에 생기가 넘쳤다. 사람은 떠났지만, 시는 더욱 살아났다. 그 생기는 이 어두운 시대에 균열을 일으키는 햇살처럼 향도했다. 그의 시언어는 빛의 길을 조탁했다. 이 어그러진 세계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등대처럼 견인해주었다. 예를 들면, 이 시가 그렇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시인 고정희의 표제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의 한 부분이다. 알려져 있듯이, 이 시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어머니의 죽음’이며, ‘무덤’이다. ‘존재의 부재(不在)’이며 ‘사라지는 삶’이다. 다시 말해, 여백의 공간이다. 시인은 이 부재, 죽음, 사라지는 삶에서 여백을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여백은 표면적으로는 빈 곳, 비어있는 장소다. 물러남이며, 간격이다. ‘벌어짐’이며, 이완이다. 하지만 시인이 응시한 여백 너머는 ‘탄생’이 있고 삶이 있다. 따라서, 그가 노래하듯이, 이 여백은 죽음이 탄생으로 전환되는 생존 공간이며, 삶으로 충만한 토포스다. 이렇게 시인은 무덤 앞에서 죽음 너며 생의 여백을 봄으로써 생의 충만함을 상상해낸다. 상상 속에서 찾아낸 그 여백은 죽음을 생명으로 견인하는 현실의 힘이 된다. 

시인의 또 다른 싯구에서도 이 점이 나타난다. 아래에 소개한 시 역시 생존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부드러운 시어로 투사해낸다. 
  
"<전략>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바람 부는 광장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서러운 강기슭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눈물샘을 모른다  
                                     <“눈물샘에 대한 몇 가지 고백” 중 마지막 연>

반복되는 어구 ‘사랑하지 않으면’은 시인이 작심한 시어다. 시인은 ‘사랑으로만’ 인간의 심연에서 발원하는 눈물샘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사랑만이 저 감춰져 있는 눈물샘을 터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이어야만, 마음먹고 드러내지 않으면 가까이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의 눈물샘을 말없이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단언했다. 이 사랑이 인간 안에 감춰진 채 드러나지 않는 ‘여백’을 끌어내는 강력한 동력이다. 이렇게 시인은 사랑으로써 ‘죽음’ 너머에 있는 생의 여백을 관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 생존의 시공간을 응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눈물샘을 알아보는 사랑으로만 그 여백에 시선을 둘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철학한다. ‘사랑으로 철학한다.’는 것이다. 

한편, 고정희의 시가 철학이며, 신학인 것은 그것이 죽음과 삶의 불가분적 ‘관계’를 천착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과 인간의 연결, 인간과 사물의 관계, 삶과 죽음이 한 점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백에 대한 자기 체험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며, 그의 싯구에서 시인 윤동주의 고백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인상은 우연이 아니다. 윤동주가 노래했듯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서시”의 마지막 연)하는 시인의 분투가 고정희 여백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로 이 점에서 고정희 시인의 시어가 신학이 되는 이유가 더욱 명료해진다. 그의 시어는 기독교 신학처럼 인간현실에 공감하는 현실참여-실천문학에 닻을 내려야 한다는 탄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 고정희가 관조한 ‘여백’은 인간의 생존에 대한 진지한 자기 번뇌와 그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가장 원초적으로 투사한 시적, 철학적, 신학적 용어이다. 철학의 기저를 딛고 신의 일상적 언어로 재진술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정희의 시에서 철학은 인간의 고통을 신의 성품으로 해소하려는 인간의 노력이고, 신학은 신의 고뇌를 인간의 역량으로 실현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묘사된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여백에 근거한 고정희의 시문학과 철학과 신학은 이 세계의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탄원을 함의한 동연 관계라 할 수 있다. 자기 규범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이 세계 속 다양한 생명이 상호 유연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노력을 힘겨워도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처럼 고정희의 시에서 문학은 철학과 신학을 ‘시’라는 세계 공동 언어로 표출한다. 시(詩)는 말(言)의 공간(寺)이기에 더욱 그렇다. 철학과 신학이 연동하는 상상은 문학으로써 현실에서 빛을 발한다. 동시에 문학은 은유로써 철학과 신학을 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도록 엮어낸다. 이런 관계 설정은 사실 과장된 것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는 인간의 삶에 밀착된 운율있는 내러티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라는 장르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담긴 이야기로 규정된다. 

한편, 고대로부터 운문이면서도 산문 형식으로 서술된 시는 이야기를 담은 철학이며 내러티브를 함축한 신학의 문학적 기법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처드 M. 로티(Richard McKay Rorty, 1931~2007)가 ‘시로서 철학(Philosophy as Poetry)’을 주장하는 것은 이 점을 더욱 명확하게 논증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가 철학의 언어에 대해, ‘현실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시로써 작동할 때 철학답게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비록 이런 주장이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이 시로 평가 절하되는 것과 같아 보일지 모른다(그들은 이런 시철학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해보면, 철학은 시로 변환할 때 비로소 그 존재론적 가치가 빛난다는 것은 허튼 주장은 아닌 듯하다. 그 철학이 시(詩)의 상상력에 토대를 두고 현실을 견인하는 의미 있는 서사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의 견해를 빌리자면, 이와 같은 시문학은 (시와 소설의 경우) 이 굴곡지고 예측할 수 없는 시대를 견뎌내는 데 가장 적합한 정치적, 사회적 환대를 견인하는 도구로 작동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즉 철학이 실린 문학을 통해 이 세계는 환대와 공감(empathy)이라는 정의의 책임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철학이나 신학 자체가 아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현실과 밀접하게 공감하며, 환대하면서 체화할 수 있는지다. 앞서 본대로 고대 <테힐림>의 경우에도, 시인은 자신의 신학을 이 현실에서 문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분투했다. 그리하여 그 시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삶에 공감하는 신학적 문학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견고하게 유지했다. 당연히 오늘날에도 이런 문학의 삶을 유지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중 한 사람으로 나는 시인 고정희를 생각한 것이다. 그 역시 고대 시인의 길을 가장 잘 모사하며 걸어가는 현대의 시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오늘날 철학으로서 시의 자리는 끝없이 위협받는다. 고정희의 분투가 찻잔의 폭풍처럼 끝나버린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의 시가 쉼 없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대변되는 물질문명은 전위대처럼 그의 시가 남긴 여백을 빠르게 잠식해 나가기 때문이다. 발달한 기계 문명 안에서 시의 원천은 가뭄이 든다. 그로 인해 인간은 건조해지고 있다. ‘안전한 지대’는 더는 안전하지 않다. 더군다나 오늘도 우리 시대는 전염병과 세계 정치의 불안정, 신의 전쟁, 정의와 공의가 엉켜버렸다.

보이는 경계만이 중요하기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다. 정의로 가장된 불법시대로 더 빠져든다. 벗어나지 못한다. 갈수록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 안전한 지대가 꼭 필요한 이들이 늘어나지만, 그 토대는 요원하다.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들, 예고 없이 다가오는 일, 예측 불가한 이야기들이 안전한 지대가 생성되기 전에 증식하고 변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힘겹고, 무고한 싸움에 직면할수록 ‘안전한 지대’를 상상해낼 힘을 제공하는 일은 더욱 절실하다.

안전한 지대 그 구원의 공간을 위한 문학과 신학의 분투 

고대 히브리인들의 한 노래는 그런 분투의 증거다. 예를 들어 히브리인들의 기도시 테힐림(시편)의 열두 번째 노래 중 다섯 번째 구절에 이런 싯구가 있다. 
 
야훼가 말한다. “불쌍한 자들이 억압받는 것과 굶주리는 자들의 탄식 때문에 내가 이제 일어나려 한다. 그리하여 그가/내가 희망하는 ‘숨 쉴만한 구원/안전한 지대’에 자리 잡게 할 것이다.”(개인 번역)

이 구절에서 고대 시인은 ‘브예샤 야피아흐 로(beyēŝa yapîaḥ lô)’를 강조한다. 이 말은 ‘인간이 희망하는 숨 쉴 수 있는 자유, 구원’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한 안전한 공간이며 구원의 터전이다. 다른 번역을 보자면, ‘인간이 갈망하는 구원’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표준새번역)

이 번역들에서 보듯이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는 곧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과 호응한다. 의미의 동등성이라는 번역 원칙을 고려한다면,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는 곧 ‘그가 갈망하는 구원’과 한 의미 단위(semantic unit)로 볼 수 있다. 두 표현은 은유다. 모두 이 땅에서 신의 시선이 머무는 공간을 비유한다. 

알려진 대로, 문학에서 은유는 적절한 상상을 촉발할 때 의미가 심화하는 창의성의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가슴이 막히고(눌림), 숨이 막히는(탄식) 이들을 위한 ‘숨 쉴 만한 공간’은 필연적으로 눌린 자들이 갈망하는 구원과 연동되고 그들이 안전하게 머물 현실 공간과 긴밀해진다. 그런 점에서 고대 히브리 시인이 선택한 ‘브예사 야피아흐’라는 은유는 현실의 생존 공간으로 창발한다. ‘땅의 사람들’에게 적절한 구원이 그들을 보호하는 ‘안전한 지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테힐림>의 한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안전한 지대’와 ‘구원’을 긴밀하게 연결함으로써 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안전한 지대’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고 촉구하려는 것이다. 그 안전지대의 확보와 수여가 신의 정의로운 역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안전한 구원 공간이야말로 신이 말하는 자신의 통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로 하자면 죽음 너머에 있는 생존을 위한 ‘여백’이기 때문이다. 이 문학적 상상은 이 흔들리는 세계에서 우리가 실현해야 할 신학의 체현(體現)과 폭넓게 맞닿아있다.

무엇보다 다큐멘터리사진작가 이강산의 증언에 의한다면, ‘사람들이 살아있는 생존 공간으로서 여인숙’이기도 하다. 특히 이강산이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인 ‘여인숙’에서 땅의 사람들을 위해 안전한 공간을 호소하는 것과 옛 시인의 짧은 구절 사이에는 신학적 동연성이 견고하게 놓여있다. 이처럼 옛시인과 고정희와 이강산의 탐구는 죽음의 시공간에서 인간의 생존 시간이라는 여백을 관조했다는 점에서 사상적으로 연동한다. 

왜 우리는 타인의 삶을 지키려 하는가?

시와 신학과 철학은 인간을 위한 그 문학적 기능을 공유한다. 물론 삶을 진솔하게 대면하는 시와 철학, 그리고 신학이 상호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기대만 클 뿐, 실질적 관계는 요원해 보인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시는 현실일 수 없고, 상상일 뿐이며, 신학은 이념에 불과하다고 냉정하게 비평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시인들의 시, 소설가들의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신적 성품을 어루만지는 신학의 틈에서 아름다운 산문은 창발해왔다. 이 문학적 상상 속에서 안전한 지대라는 구원의 공간이 구축된다. 다시 말해 우리 현실에 대응하는 현실적 힘이 드러나는 것이다.

신학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비록 오늘날 신학이 그 자체로 세계를 지탱할 위로와 권면의 힘을 스스로 소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신학은 이 험곡같은 현실에서 '안전한 지대'로서 신의 따뜻한 위로를 끊임없이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우리가 함몰된 상황으로부터 우리에게 여백을 선물처럼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신학이 문학이라는 인간의 영역에 몸을 맡길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상상을 땅의 현실로 실현해낼 수 있다는 세속적 희망을 더 강력하게 옹호할 수 있다.      

앞선 본 대로, 이강산의 일기와 옛 시인의 간구, 고정희의 노래 모두 신을 향한 땅의 사람들의 탄원을 대변한다. 이들은 공통으로 펜데믹19 이후 엔데믹의 그늘에 머물러 있는 세계, 정보(데이터)에 지배당하는 ‘인포크라시(한병철의 용어)’의 시대에는 더욱 안전지대, 그 갈망하는 구원의 공간이 선물처럼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진가 이강산이 주장하는 ‘인간의 시간’은 인간의 생존권리가 당당하게 유지되는 시간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인간을 환대하는 정의가 실현되는 인권의 시간이며 시철학이다. 이 용어는 저자의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된 흔적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저 권리마저 탈취된 자들을 옹호하는 환대 의지를 일깨운다. 또한, 죽음까지 내몰린 여인숙 사람들이 여전히 사람답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들 사이에 끈적하고, 견실하며, 보이지 않아도 공유되는 인간의 권리가 시간처럼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체증했다. 

특히 이강산의 다큐 일기는 이 자기중심적 시대에 안전한 공간을 상실해가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일깨운다. 다른 면에서 이 책은 신학과 통섭하는 문학과 철학의 공통 주제를 일깨운다. 그것은 ‘환대이며, 공감이다.’ 비록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위협하는 것으로 작동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안전한 지대를 위한 신과 인간의 협업은 여전하다는 것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르포 문학을 넘어선다. 사회철학적 해석서이자 안내서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책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성을 지향한다. 또한 화려하고 질서정연한 문학적 도구나 변증적 수사법(rhetoric)은 드러나지 않지만, 이 책은 따뜻한 사회, 정의로운 세계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사회적 공감력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시간’이 ‘짐승의 시간’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부드러운 권력으로 변호하는 사진르포 미학의 한 결실을 잘 보여준다.

공감의 철학으로 여인숙 밖의 사람들에게 여인숙의 삶을 주목하도록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권면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으며, 나는 타인을 안전한 지대로 안내하는 것이 곧 나의 안전한 지대를 구축한다는 평범한 정의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라고 자연스럽게 되묻는다.

 

김흥현 
한국성서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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