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가기 마련 아닌가.
훌륭한 나라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산다.
‘견리망의’. 전국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이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라는 뜻으로 행태 또는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어떤, 행태일까? 견리망의를 추천한 모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정치권을 지목했다. 이른바 당파에 갇혀, 또는 당파적 논리를 내세워 당파의 이익을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추구하는 정치권력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대한 날선 비판이겠다. 이 비판의 화살을 정치권력 외 경제 사회적인 기타 권력 집단에 돌려도 아무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독자가 견리망의가 함축하는 비판, 아니 차라리 한탄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추측해 본다. 그런데 굳이 사족을 붙이자면, 몇 가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가 있기는 하다. 첫째, 이로움과 의로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이다. 견리망의라는 구절에서, 이로움과 의로움은 서로 긴장 및 갈등 관계에 있다. 이로움은 의로움을 훼손한다. 사실 이로움과 의로움 간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맹자』에 나온다. 맹자를 만난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맹자가 양나라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지 물었다. 그러자 맹자가 일갈한다. “왕이시여,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오직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이로움을 함축하고 있는 의로움
그런데 이로움과 의로움의 관계가 과연 대립적인 것일까? 서양 전통에서 의로움 또는 정의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의미 규정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일 것이다. 이 규정에서 몫은 이로움에 다름없다. 의로움은 이로움을 개념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이로움 없는 의로움을 상상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이로움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 없는 추상적인 원리로서의 정의는, 자칫 과장된 비분강개의 공허한 몸짓으로 전락할 공산이 크고 더 나쁘게는 당파적 이익과 논리의 관철에 남용되기 쉬울 것이다.
맹자도 이로움을 전적으로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곳곳에서 백성들의 이로움을 돌볼 것을 역설하고 있다. 맹자는 다만 통치 집단이 지녀야 할 원칙으로서 의로움을 강조했을 뿐이다.
둘째, 첫째 문제로부터 이어지는 ‘관계의 이로움’에 대한 고려이다. 앞서 의로움에 관한 서양 전통의 고전적인 의미 규정을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이라고 했는데, 이 규정은 개인들 각각의 이로움이 주어져 있고 이 이로움들의 총합이 의로움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의로움의 원칙과 제도에 의해 관계의 이로움이 발명되고 나서야 개인들 각각의 이로움도 비로소 그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뜻이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자연 상태는 관계의 이로움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가상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만인의 만인의 투쟁으로 상징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며 극도로 비참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관계의 이로움이 없기에 개인들 각각의 이로움도 없다. 인간은 사회계약이라는 형식으로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났다. 관계의 이로움이 먼저이고 개인들 각각의 이로움은 나중이다. 관계의 이로움에 대한 고려는 이로움과 의로움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도록 한다.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마지막 셋째 문제가 있다. 실천적 지침으로서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자각이다. 잘 알려졌듯, 견리망의는 보다 깊은 연원을 지닌 사자성어인 견리사의가 후대의 변용을 거쳐 정착된 말이다. 견리사의는 춘추 시대의 인물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 「헌문」 편에 등장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완성된 인간이 지녀야 할 미덕에 대해 스승에게 물었고, 공자는 그 답변으로 견리사의를 여러 미덕들 중 하나로 제시했다.
견리사의, 1인칭의 실천적 과제·지침
견리사의는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라는 뜻으로 맥락과 의미에서 견리망의와 구분된다. 공자는 자로에게 단순히 완성된 인간에 대해 품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에게 견리사의의 규범적 태도를 함양하고 인격을 도야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라는 견리망의가 행태 또는 세태에 대한 3인칭의 평가라면, 견리사의는 공자가 제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1인칭의 실천적 과제이다.
필자가 굳이 견리사의를 들먹이는 까닭은 견리망의 추천 이유 중 각자도생의 투쟁의 장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의 세태에 대한 뼈아픈 지적 때문이다. 이 지적은 권력 집단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견리망의는 보편적이다. 공정하게 말해, 우리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견리망의의 행태 또는 세태에 연루되어 있다. 남녀에서 노소, 위로부터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에 이르기까지 예외는 없다.
물론 필자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굽어보는 3인칭의 자세로는 부족하다. 짐짓 객관적인 이런 자세는 나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들에게 엄격하며, 그 이면에 냉소와 무관심의 민낯을 숨기고 있기 십상이다. 공자의 모범을 따라 견리사의의 정신을 스스로 되새기고 일상에서 하나씩 실천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가기 마련 아닌가. 그 빛과 어둠 모두 고스란히 우리 자신의 몫일 것이다. 훌륭한 나라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산다.
이제 2024년 새해가 밝았다. 누구에게나 삶과 죽음은 지난해와 마찬가지의 진지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진지함은 비할 데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 온전한 진지함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새해에는 어떤 시인이 희구했던 “복사씨와 살구씨가 / 한번은 이렇게 / 사랑에 미쳐 날뛸 날”(김수영 시인의 「사랑의 변주곡」)이 이 땅에 도래하기를 소망해 본다.
심지원
동국대 철학과 교수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