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6:45 (토)
철학 게릴라의 에세이철학, 하나의 장르가 되다
철학 게릴라의 에세이철학, 하나의 장르가 되다
  • 최승우
  • 승인 2023.10.31 1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_『일상이 철학이다』 | 이종철 지음 | 모시는 사람들 | 317쪽

이 책은 저자가 SNS와 잡지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세계에 대한 그의 호기심과 관심이 흥미롭다. 이 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차례를 살펴보자. 제1부는 ‘일상과 철학’으로 삶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저자는 이미 전작 『철학과 비판』에서 에세이철학의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현대철학은 현학의 극치로 흘러 이제는 소수의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지 오래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철학 없는 삶은 야만이고 삶 없는 철학은 공허”일 것이다. 철학자 이종철의 시도는 그런 점에서 칸트의 본질에 충실하다. 필자가 높게 사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2부는 영화와 비평이다. 씨네21을 위시한 여타 영화 비평들을 보면 철학에 많은 빚을 지는 것처럼 보인다. 보기에 따라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 이론에 충실해 때로는 읽기 거북할 때가 있다. 반면 저자는 쉬운 글쓰기를 지향해(여담이지만, 그의 연세대 선배였던 마광수 역시 쉬운 글쓰기를 지향했다. 이쯤 되면 연세대의 학문적 DNA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아포리즘을 끌어낸다. 가독성이 매우 좋고 필자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영화의 장면을 이미지처럼 생생하게 서술하는 묘사가 뛰어나다. 철학 이론이 물과 기름처럼 어색하기보다는 삶과 밀착해 잘 엉겨있다. 철학과 영화의 짝짓기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당장 가까운 MTV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도 영화를 여러 번 건드렸다. 저자가 전문 영화 비평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식견을 보여준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3부는 사회와 정치다. 맑스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철학이 상아탑에 갇혀 생명력을 잃는 순간 무지와 반지성이 곰팡이처럼 자라나게 된다. 이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의 평범성’의 한나 아렌트나 미 제국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노엄 촘스키처럼 세상을 이끌었던 철학자들은 단순히 ‘해석’에만 치중하지 않고 변혁하려 했다. 철학자가 세상사에 관심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저자 역시 철학자의 직업병을 버릴 수는 없는지, 한국 정치 사회에 대한 생각을 은근히 피력한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챕터 중에 가장 내용이 짧다는 것이다. 애써 말을 아낀 것인지, 아니면 관심사가 적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전자에 가깝지 않나싶다. 야만적인 한국 정치계의 풍토를 상기한다면 굳이 벌집을 이리저리 건들 필요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4부는 도구와 기술이다. 저자와 나는 페이스북 벗이다. 일찍이 컴퓨터를 위시한 첨단 IT 기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를 보고 경탄해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적지 않은 연세에 신문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해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반성마저 들었다. 필자는 80년대 후반생임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IT에 어둡고 아날로그적이다.(지금 이 글도 연필로 쓰고 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필자처럼 IT와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고령인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별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이유도 있으리라. 저자는 블루투스와 음성인식 기술을 경험으로 구수한 입담을 풀어낸다. 악필에 대한 자조적 고백을 필두로 음성인식 기술이 “그간 문자에 억눌려오거나 문자 소통에 장애를 겪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다시금 역사의 무대에 적극 등장하고 새로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도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 이 챕터의 마지막이 「AI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술 도구 문명의 끝은 인간에 대한 도전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에 대한 자문과 고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5부 역사와 문자, 그리고 한글은 그가 가진 애국심의 발로를 보여준다. 문자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가진 철학자의 종교이자 숙명이라는 점에서 가장 많은 내용이 할애되어 있다. 한글에 대한 무한한 애정도 듬뿍 담겨있다. 또한 ‘엽전들은 안 된다’는 민족적 자조의식에서 탈피하여 떨쳐내자는 거침없는 주장도 펼친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 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적 자원에 긍지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을 하는가? 나는 이것을 열등감에 기인한다고 보고 이런 열등의식이 한국의 지배층에 유전자처럼 각인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글에 대한 파트가 긴 것도 특징이다. 자신감을 갖자는 내용이다. “일본의 침략적 주장은 경계하나 본인들이 최고라는 정신은 배울 점이 있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고대사에 대한 입장도 궤를 같이 하는데 환단고기와 천부경을 거론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말했다. 그 누구보다도 가슴 뜨거운 철학자 이종철은 어쩌면 “철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철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6부는 한국의 대학과 교육이다. 수 십 년을 강단에 종사했고 강단철학자였던 저자가 느낀 부분을 열정적으로, 때로는 거칠게 서술했다. 인문학의 위기를 두고 “여전히 인문학 분야들은 수입 오퍼상이나 고물상 수집 수준”이라는 일갈은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거침없고 통렬한 비판은 애정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안타까운 쓰라림도 담겨있는 듯하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넘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안하는 그가 변방의 아웃사이더 철학자인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일이다. 안락의자에 앉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지적 허영에 빠지는 대신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한 그는 여전한 현역 파이터다.

앞서 말한 바 있듯 『일상이 철학이다』는 『철학과 비판』의 후속작이며 에세이철학 시리즈의 시즌 2와도 같다. 저자인 이종철 철학자는 일상과 괴리된 철학을 혁파하고 일상을 철학화하자고 주장한다. 그 도구로서 에세이철학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하나의 장르로 구축시켰다. 그의 실험은 주체적이며 일찍이 보기 힘든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신선하다. 동시에 필자도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철학의 시원은 상아탑의 논문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 일종의 에세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철학의 본래적 정신으로의 회귀이기 때문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