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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자유 철학, 역사 성패 갈랐다
동·서양의 자유 철학, 역사 성패 갈랐다
  • 최승우
  • 승인 2023.04.17 09:1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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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㊸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달 18일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가 「동서양의 ‘자유’ 비교」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44강은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국제대학원)의 「미·중 관계와 패권 경쟁의 미래」, 제45강은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의 「다원주의적 국제 질서의 철학과 비전」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서양인은 자신의 언어 덕분에 다른 문화권보다 자기나 자유와 관련된 사태에 더 풍부하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문법적 습관보다 중요한 것이 역사적 전통일 수 있다. 동서의 윤리적 전통, 특히 자기 윤리학의 전통은 각각 공자와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한다.

동서의 자유 개념은 너무 달라서 둘을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한 과제일 수 있다. 특히 서양의 근대적 자유 개념을 기준으로 하면, 동양에는 자유 개념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런 유치한 관점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 왜 유치한가? 자유를 너무 단순하게 정의하기 때문이다.

자유만큼 보편적인 관념은 없고, 자유가 드러나는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는 그만큼 다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할 주제다. 물론 자유를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동서 비교는 완결된 해답은커녕 납득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결과를 내놓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일차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에서 자유가 이해되는 문제의 틀이나 표현 문법을 드러내야 하는 어려운 과제와 직면한다. 사실 동서의 문화적 차이는 대단히 크고, 자유는 그 문화적 차이가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첨예한 주제다. 게다가 문화적 차이보다 더 큰 걸림돌이 바로 자유 개념 자체의 애매함이다.

자유는 행복 같은 용어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개인‧사회‧문화권마다 주관적 조건이 천차만별이어서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 의미를 정하기 어렵다. 한 문화권에서도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이 자유의 관념이다. 더구나 동서 문화는 존재론‧윤리학‧정치학 같은 여러 수준에서 자기 나름의 자유 개념을 개진해왔다.

그러나 동서의 접촉면은 매우 드물어 보인다. 특히 근대 유럽의 자유 개념은 민주주의‧자유주의‧개인주의 같은 정치적 이념과 함께 형성돼왔다. 그 배경에는 정치‧경제학적 체제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동양에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정치체제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는 행복처럼 애매한 개념이면서 동시에 동서고금의 인간이 추구해 온 가장 소중한 가치다. 동서 사상사는 똑같이 자유를 추구해온 역사라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자유 개념부터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동서 자유 개념의 비교는 불가능하되 불가피한 과제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유가 전통의 근본 한계는 획일주의의 위험성과 그 배후에 도사린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있다”라며 “다양한 가치 추구의 공존을 전제하는 다원주의를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 근본 한계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유가 전통의 근본 한계는 획일주의의 위험성과 그 배후에 도사린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있다”라며 “다양한 가치 추구의 공존을 전제하는 다원주의를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 근본 한계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특히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동서 비교는 우리 인문 사회과학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동서고금의 사상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다양한 반목이 일어나는 지역이 한반도다. 그런 갈등이 분열과 혼돈이 아니라 창조적 활력의 원천으로 타오르게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는 비교의 작업에 능숙해져야 한다.

카뮈는 불가능하되 불가피한 사태, 무의미하되 당위적인 사태를 ‘부조리(absurd)’하다고 했다. 다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기를 멈추지 않는 시시포스의 운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동서 자유 개념의 비교는 한국 인문 사회과학에 대해 그런 종류의 운명적 과제인지 모른다. 서양인은 자신의 언어 덕분에 다른 문화권보다 자기나 자유와 관련된 사태에 더 풍부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문법적 습관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법적 습관보다 중요한 것이 역사적 전통이다. 동서의 윤리적 전통, 특히 자기 윤리학의 전통은 각각 공자와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동서의 자기 윤리학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자기 개념을 좀 더 세분하고 체계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유 개념 못지않게 자기 개념 또한 애매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를 나누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에서 동서가 너무 다르다. 

우리는 자기를 네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운동을 네 가지 원인을 통해 설명한다. 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그리고 목적인이 그것이다. 자기나 자아도 이런 네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서양에서 자기의 형상은 보통 영혼으로, 질료는 신체로 설정된다. 영혼은 지‧정‧의로 나뉘거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능력 이론에서는 감각‧상상‧기억‧지성 등으로 분할된다.

중국에서는 자기는 마음과 몸으로 나뉘지만,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대동소이한 정치‧윤리학을 제시했다. 또 맹자와 주자에게서도 루소-칸트에게서 못지않게 자율적인 주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전통은 자기의 구조와 심신의 이미지를 전혀 다르게 설정하는 까닭에 이런 상응 관계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실천적 행위를 설명할 때 서양에서는 의지나 자의를 가장 중요한 심리적 기능을 간주하지만, 중국에서는 의지 개념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 역할은 미미하다. 양쪽의 상응 관계는 질료-형상 관계나 체용(體用)의 관점보다는 작용과 목적의 관점에서 찾는다면 일이 훨씬 쉬울 것이다.

특히 작용의 관점이 중요하다. 이는 도덕적 능력이나 윤리의 가능성을 설명해주는 것은 그 동기에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도덕이나 윤리의 가능성은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과 공동체를 위한 자기 포기의 가능성에서 온다. 

명예를 좇는가 이익을 좇는가? 이런 물음에서부터 명분과 실리, 자기애와 법칙의 존경 등 많은 구분법이 윤리의 본성을 설명에 동원되기 마련이다. 자기 보존의 본능을 능가하는 자기희생, 생명의 포기에까지 이르는 그 자기희생의 가능성이 없다면 도덕이든 윤리도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작용 혹은 동기의 측면에서 공자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들의 후예는 모두 유사한 관점을 취한다.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도덕적 가치임을 가르쳤고, 자기의 자기다움은 생물학적 가능성을 넘어서는 차원에 있음을 강조했다. 동서 윤리학은 마음의 능력을 나누는 방식이 너무 달라 형상과 질료의 관점에서는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작용의 관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도덕적 자기를 움직이는 동기를 현실원칙 너머에서 찾고, 생물학적 조건의 초과는 충동에서 찾는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하자면, 동서의 윤리학에서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은 죽음충동이다. 동서 윤리학에서 자기를 움직이는 작용인은 현실원칙 저편에서 온다.

맹자의 대체는 선험적 자기로서의 경험적 자기인 소체와 이 점에서 구별된다. 경험적 자기는 현실원칙(쾌락원칙)을 따른다. 쾌를 쫓고 불쾌를 피하는 일반적 경향이 쾌락원칙이다. 이익을 추구하고 불이익을 모면하려는 경향이 현실원칙이다. 그러나 선험적 자기는 죽음충동과 관계하면서 생명의 논리를 뒤집는다. 

서양의 공화정에서 공공선은 불변의 가치로 주어진 것일 수도 있고, 끊임없는 토론의 대상일 수도 있다. 고대의 공화주의와 근대의 공화주의 사이의 차이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화하면서 공공선은 토론 불가능한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고 부단한 재검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근대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와 관용은 공공선에 대한 부단한 이의제기의 가능성과 맞물린 개념이다.

혁명적인 사건에서 무한히 멀어지고 질서 유지를 위한 행정에 무한히 가까워지는 것이 유교적 정치다. 이런 사정은 청나라 말부터 서양의 자유 개념을 들여오고 근대적 공화정을 받아들일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서세동점의 위세 앞에 독립된 국가의 수립과 민족 보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모든 정치적 행위의 마지막 목표로 자리 잡음에 따라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끊임없이 유보됐다.

이는 해방 후의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빈곤 탈출과 국가 안보라는 공공선에 짓눌려 계몽주의 이래 서양인이 가졌던 자유의 관념은 이 땅에서 제대로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자유주의는 냉전 갈등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반공주의와 동의어가 됐고, 민족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서구주의나 외세 의존주의 일반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본래의 의미를 잃고 엉뚱한 의미를 띠면서 건강한 민주주의의 최대 걸림돌이 돼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유가 전통의 근본 한계는 획일주의의 위험성과 그 배후에 도사린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있다. 다양한 가치 추구의 공존을 전제하는 다원주의를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 근본 한계다. 19세기 이후 서양의 계몽주의를 수용한 이후에도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대의에 압도돼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다면 최근 중국에서 등장한 이른바 ‘유가적 능력주의’는 유가 전통의 고질적인 한계인 획일주의, 또 그것을 조장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한계를 타개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떠한 형태이든 모든 능력주의는 정치를 치안의 문제로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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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3-04-17 20:36:47
.동로마로 이어지다가, 중세시대에는 가톨릭이 중남미에 보급되었고, 프랑스가 통치하던 캐나다도 영국에 양도하였지만, 캐나다는 아작도 가톨릭이 대다수입니다. 근대는 서유럽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인데, 이때의 학교교육 교과서 내용들이, 문과.이과 공통으로, 해방후 한국애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판단됩니다. 불교는 고대의 인도에서 성립되어 왕성한 포교를 하면서, 세계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브라만교에 대항하여 일어난 부처의 불교를, 인도의 선발신앙인 브라만교(힌두교신앙)가 1천 몇백년동안 강하게 탄압하며, 현재에 이르고 았습니다.

윤진한 2023-04-17 20:35:37
국자감은 경사대학당과 베이징대로 계승됨), 그리고 서양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파리대학만 세계사 교과서로 가르쳐 왔습니다. 영국의 옥스포드도 세계사에서는 가르치지 않아온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세계사에서의 이러한 교육은 과거.현재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과서교육과 대중언론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편,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고대의 세계 종교로는 유교, 기독교, 불교가 았습니다. 유교는 한나라가 유교를 국교로 하고, 세계제국을 건설하여 고대의 중국, 한국,베트남,몽고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었습니다. 유교는 하느님(天)과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그리고 세계제국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여, 헬레니즘시대의 신앙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숭배하는 기독교 신앙이 나중의 서로마.동

윤진한 2023-04-17 20:34:45
대체적으로 동양은 공자님을 떠나 살 수 없고, 서양은 에수님의 가르침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자유,역사,철학이든 어떤 학문이든... 물론 공자님이전에 태어난 노자등의 제자백가 사상도 있고,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기전 헬레니즘시대의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등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한국의 국사와 세계사는 다릅니다. 한국 국내의 학설이 맞아도, 세계적 시각으로 보면,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대학을 선정하여 교육시키기 때문에, 한국의 대학.종교관련 주장을, 세계사에서는 가르치지 않아서, 세계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건 어찌할수가 없습니다. 세계사에서 배우는 세계적인 대학은 중국 한나라 태학(세계 최초의 대학. 한나라 태학은 위나라 태학), 이후의 국자감(수,당,송, 원.명.청의 국자감, 원.명.청의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