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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예술’…현대미술을 말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예술’…현대미술을 말하다
  • 최승우
  • 승인 2024.03.14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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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㉛ 이찬웅 이화여대 교수(인문과학원)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과학기술·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3일 이찬웅 이화여대 교수(인문과학원)가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32강은 김회권 숭실대 교수(기독교학과)의 「21세기 종교와 종교 갈등」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오늘날 생태 위기와 기술 가속 안에서 인간의 초상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이에 대한 예술의 반응으로서 이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대답의 방향은 상이한 곳들을 향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으로 규정된 인간상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주류 계급과 역사의 방향을 운운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기를 요구하고, 발전의 바깥으로 밀려난 것과 잠재적 이미지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을 두 눈 중 적어도 한 눈으로 보기를 기대한다.

애초 제안받았던 강연의 주제는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 강연의 주제를 삼기에는 몇 가지 측면에서 어렵다고 생각됐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예술의 수없이 많은 장르를 다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미술과 음악, 무용과 영화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렵고, 또한 다룬다 해도 너무 추상적인 얘기가 돼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발표의 범위를 현대 미술 중에서 주목할 만한 몇몇 작품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두 번째 문제는 거리의 부재와 양식의 다양화에 있다. 세 번째 문제는 이 강연 제목의 ‘21세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산술적인 표기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분기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역사학자들이 흔히 말하듯이, 2001년에 있었던 9·11 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삼든지, 또는 미디어의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아이폰이 등장한 2007년을 기점으로 삼는 일 등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미술의 경우, 사정은 어떠하며, 어디를 기점으로 삼을 수 있는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단절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가?

이찬웅 이화여대 교수(인문과학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적이고 실용적 한계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때 가장 고귀한 힘을 보여준다”라며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술적인 것을 통해, 기술적인 것과 대비하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확장하고 실천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더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어떤 힘과 성질을 찾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이찬웅 이화여대 교수(인문과학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적이고 실용적 한계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때 가장 고귀한 힘을 보여준다”라며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술적인 것을 통해, 기술적인 것과 대비하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확장하고 실천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더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어떤 힘과 성질을 찾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파울 클레는 현대 예술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여러 현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보일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상이한 길을 따라 탐구했다.

첫 번째로,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작업을 현대 미술의 아이콘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에 발표한 그의 작품 「시계(The Clock)」는 그 다음 해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기존에 상영된 영화들에서 많은 장면들을 발췌해서 편집한 것이다. 상영이 진행되는 동안 실제 시간에 맞춰 영화 안에서도 1분 단위로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각 영화 장면 안에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내용과 맞물려 시간이 이처럼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은 관람객에게 묘한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양가적이다. 이 작품을 첫머리에 소개하는 것은, 이 양가성이 단지 한 작품을 넘어서 현대 미술 전체의 양가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계」라는 작품을 현대 미술의 특징들을 보여주는 하나의 범례로서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시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만큼, 현대 미술에 함축된 시간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미술이 사회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만큼, 이는 오늘날 우리가 시간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자크 랑시에르는 『모던 타임스』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미학 이론을 영화와 미디어아트 등의 운동 이미지에 적용해 다시 한번 활성화한다. 『모던 타임스』라는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시간성이라는 주제와 그것의 여러 양상들에 대해 사유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라는 작품은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적 체제 안에서도 어떤 경계에 위치하고 그만큼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히토 슈타이얼은 최근 10년간 미술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미술계’가 너무 넓은 말이라면, 편의상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형성된 ‘비판적’ 미술과 아트페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적’ 미술을 구분해 볼 수 있겠고, 그중 그녀는 비판적 미술계 내에서 상업 예술과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계속해서 고취하고, 대치의 전선을 사회 변화에 뒤쳐지지 않도록 밀고 나가는 데 큰 공헌을 해왔다. 그녀의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은 자본주의 체제와 현대 미술계의 양쪽을 능숙하게 오간다. 심미적 미술이 세속적인 사회와 우아하게 구분되기는커녕, 어떻게 미술계가 금융-군사-데이터-자본주의의 원리가 무차별적으로 관철되는 대표적인 영역인지 입증한다(자본주의 앞에 이렇게 여러 개의 명사를 하이픈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기도 하다).

히토 슈타이얼은 마르크스와 벤야민의 깊은 영향 하에서 21세기에 사회와 미술이 어떻게 분리 불가능하게 서로 깊게 얽혀 있는지 분석한다. 그녀는 ‘빈곤한(poor)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미지론을 전개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에서 20세기 독일에서 아마도 가장 명민했다고 말해도 좋을 사상가, 벤야민의 긴 그림자를 발견한다. 사실 히토 슈타이얼은 벤야민이 현대 예술 일반에 끊임없이 큰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 진영 안에서 속해 있었으면서도 그가 맞서 싸웠던 것은 사회주의가 발전과 진보라는 이념 하에 종속돼 있다는 관념의 대세였다.

다음 미술 작가로 프랑스 출신으로 뉴욕에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피에르 위그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영상과 설치에 넓게 걸쳐 있다. 일반적으로 그는 생명과 기술·현실과 허구·전시와 창조를 공존하게 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작품 「무제(인간 가면)」(2014)는 어떤 작은 술집에서 일본 전통 가면을 쓴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선술집은 어떤 사람도 없어 황량하고 공포스러운 느낌마저 나는데, 한 작은 소녀가 가면을 쓰고 서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업원은 선술집에서 필요한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행동을 계속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관람객은 뭔가 이질적이고 이상하다고 느낀다. 이 작은 생명체는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제목처럼 인간 가면을 쓴 원숭이인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사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우선, 인간 없는 풍경은 2011년 일어났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에서 원숭이만이 남아 훈련된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철학자로 아마도 지난 세기 가장 넓은 영역을 다루었고 가장 많은 철학 개념을 만들어낸 철학자일 것이다. 그가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과타리와 함께 만든 많은 개념들, 예를 들어 노마드·리좀·기계·배치·정동·생성·기관 없는 신체·영토화와 탈영토화·횡단성 등은 동시대의 변화를 때로는 포착하고 때로는 추동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됐다.

피에르 위그의 다른 대표작 「After Alife Ahead」(2017)를 살펴보자. 두운을 맞춘 이 작품 제목을 번역을 하자면 “미리 인공생명 이후에”쯤이 된다. 여기에서 ‘Alife’는 오타가 아니고 한 단어로 인공생명, ‘Artificial Life’의 약자이다. 이 작품은 201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설치된 작품이다. 

작가는 도시를 둘러보던 중 폐허로 버려진 아이스링크에 이끌려서 이 작품을 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을 거대한 규모로 한데 모으고 연결하고 있다. 유기체와 기계·생물과 무생물·물리적 자연과 증강 현실을 배치하고 있다. ‘배치’라는 말을 했는데, 이 작품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한 의미에서 진정한 ‘배치(agencement)’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미디어와 설치작가에 대해 얘기했는데, 마지막으로 회화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사실 많은 비평가들은 21세기에 회화가 복귀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지난 세기말에는 미디어 아트가 새로운 매체의 대세를 형성하면서 회화를 낡은 양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전망에서 벗어나서 회화가 다시 대중과 평단 전체에 걸쳐 사랑받고 주목받는 흐름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더 이상 미래를 암시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아이러니하게도 회화가 소셜 미디어에 잘 어울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두운 영화관에서는 인스타그램을 할 수 없지만, 밝은 미술관이 회화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업로드하기에는 적합하다. 마지막 이유는 경제적인 것인데, 금융 위기를 막기 위해 풀린 엄청나게 많은 돈의 상당 부분이 미술계로 흘러 들었고, 유화가 보관과 거래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미술 작품의 주식화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회화론은 그림이 단지 인간의 지각과 기억을 보존하는 유효한 방법이라는 사실에 멈추지 않는다. 그의 예술론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걸쳐 있다. 감각적 인상과 지성적 관념이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독립적인 항이라면, 이 항들을 연결하는 연상과 상상력의 규칙은 전혀 본성이 다른 곳, 즉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인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실천이다. 연결은 항이 아니며, 무수히 많은 방식의 연결이 가능하고, 그 연결의 방식들은 각기 서로 다른 세계의 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종교·진리·역사 등을 단정적인 목소리로 내세우는 독단론에 맞서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점에서 그는 흄의 경험주의적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대담을 깊이 이해해 보자면, 미술의 존재 자체가 경험주의적 세계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회화는 단순히 세계의 재현이 아니다. 세계는 3차원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2차원으로 보고, 따라서 세계를 보는 법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니라 바로 그림이 3차원의 세계를 분할해 만들어지는 2차원 이미지의 조각들을 연결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림 덕분에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는지 알게 된다.

지금까지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는 정의, 그리고 ‘현재주의’라는 협소한 시공간의 관념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문제에 비춰, 동시대의 주요한 작가들의 작업을 살펴봤다. 이 작가들이 21세기 예술을 다 대변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위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벤야민이 예술이 역사에서 벗어나는 잔해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히토 슈타이얼은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억압받은 자들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이미지’를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들뢰즈가 예술의 심장이 결정-이미지라고 말한 것처럼, 피에르 위그는 중심과 주변·생명과 기계·현실과 허구가 서로 자리를 맞바꾸면서 새로운 시대를 예비케 하는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인간의 시선이 사진의 광학적 법칙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회화의 가치를 다시 한번 찬양할 수 있었고, 감상자의 움직임이 풍경에 포함된 그림을 통해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생태 위기와 기술 가속 안에서 인간의 초상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이에 대한 예술의 반응으로서 이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대답의 방향은 상이한 곳들을 향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으로 규정된 인간상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주류 계급과 역사의 방향을 운운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기를 요구하고, 발전의 바깥으로 밀려난 것과 잠재적 이미지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을 두 눈 중 적어도 한 눈으로 보기를 기대한다. 관람객은 초점이 맞지 않아 현기증을 느끼겠지만, 현대 미술은 이것을 견디기를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기계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현대 미술은 더욱더 인간적인 것에 천착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와는 무관하다. 현대 예술은 인간의 고유한 존재 방식·인간의 고유한 시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을 향유하도록 초대한다.
요컨대 한편에는 탈인간적이고 분열증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있기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적이고 더 고유하고 예찬하는 시선을 갖기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양자는 그렇게 생각만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토 슈타이얼과 피에르 위그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적인 것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잠정적이고 침전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적이고 실용적 한계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때 가장 고귀한 힘을 보여준다.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술적인 것을 통해, 기술적인 것과 대비하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확장하고 실천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더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어떤 힘과 성질을 찾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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