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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성공적 개념’인가 ‘의미 없는 비개념’인가
신자유주의, ‘성공적 개념’인가 ‘의미 없는 비개념’인가
  • 박찬종
  • 승인 2022.08.24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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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21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나는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측면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을 보면, 
초기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이론적·철학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치거나, 
아니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에서 섣부르게 
신자유주의의 파산과 종언을 도출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신자유주의를 ‘통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 신자유주의 그 자체를 설명해야 한다."


20세기 후반 사회과학영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개념들을 몇 가지 선정해본다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구글의 엔그램(Ngram)에 따르면, 영어권 문헌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사용된 사례는 1990년대 이후 빠르게 증가했다. 그리고 2010년을 전후하여 짧은 정체기를 거친 이후 다시 과거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급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광범위한 문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개념이 학계 내부에서 집중적으로 주목받고 또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음을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분명 성공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글 엔그램에 따르면, 영어권 문헌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1990년대 이후 빠르게 증가했다. 최근 들어 비판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너무나 이질적인 다양한 현상을 신자유주의 하나의 개념만을 갖고 포괄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Google Ngram(https://books.google.com/ngrams)

신자유주의 개념을 둘러싼 비판과 혼란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개념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너무나 이질적이고 다양한 현상들을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개념만을 가지고 포괄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는 1차원적인 소묘에 불과하며, 워낙 다양한 현상들을 통칭하다 보니 분석적으로는 의미가 없을 정도의 개념적 인플레이션을 낳는 범주일 뿐이라는 비판이다.

또한 이 개념을 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판적 학자들이나 활동가들로서, 특정한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의 비판을 위한 ‘자족적인 용어’(consolation term)로 전락했으며 과학적 개념으로서는 가치가 없다는 비난까지 가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개념의 다의성이나 엄밀성의 부족에 있다기보다는 설명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의 특정한 활용방식에 있다. 설명을 위한 이론을 구성할 때, 우선 현실과 시대의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필요를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설명이 피설명항(explanandum)과 설명항(explanans)으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이 개념은 연구자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현실의 원인을 해명하는 ‘설명항’으로서 활용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자체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피설명항’으로 활용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와 혼란은 ‘신자유주의’가 설명항으로 활용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노동의 신축화와 불안정화가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것은 마치 궁핍화와 착취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석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동어반복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설명항)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개념(피설명항)이 되어야 한다.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현실들의 공통의 기반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신자유주의로 개념화한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혼란이 발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을 고정된 실체이자 특정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연구들은 신자유주의로 정의될 수 있는 특성들과 그렇지 않은 특성들의 목록표를 만들고 다양한 국가와 사회의 성격을 분류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서구의 특정 국가들의 속성일 뿐, 다른 지역에는 적용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가령 서구에서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을 특성으로 하는데,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복지제도의 강화와 복지지출의 증가가 관찰되기에 한국은 신자유주의 사회로 규정되기 어렵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거대한 전환을 ‘신자유주의’로 규정할 때, 신자유주의의 구체적인 양상은 지역별, 국가별로 상이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통일적이고 단일한 형상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불균등하고 얼룩덜룩한(variegated)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하나의 경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제이미 펙(Jamie Peck)과 같은 학자는 ‘신자유주의’ 개념 대신 ‘신자유주의화’(neoliberalization)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는 특정한 ‘상태’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변화과정과 유연성, 그리고 지역별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진화

‘신자유주의’ 개념을 둘러싼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설명의 도구가 아닌 대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시기와 장소에 따라 스스로 진화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역사적 접근을 채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진화에 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념적 신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초기의 단계이다. 하이에크에 의해 주도된 몽페를랭협회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갱신을 목표로 했다. 하이에크는 “무엇보다 자유방임의 원칙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경직된 주장만큼 자유주의적 대의에 해를 끼친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데,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계로 인해 파시즘이나 뉴딜과 같은 ‘집단주의’의 병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을 통해 시장질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자연주의적 시장관’을 비판하면서, 시장이 작동할 수 있는 제도와 사법을 확립하는 것을 국가의 역할로 상정한다. 즉 이들은 한편으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유방임원칙을 비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에 대한 통제와 그 필연적 결과로서 개인적 자유를 침식시키는 파시즘이나 뉴딜과 같은 집단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정치적 신자유주의’이다. 1940년대 초기의 신자유주의 이념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고는 말하기 쉽지 않은 데 반해, 1950~1960년대에는 신자유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사이의 결합이 관찰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 정치세력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는 대신 이들의 정치적 주장에 관해 구체적인 근거와 이론을 제공해주었던 것인데, 이는 둘 사이의 이념적·논리적 친화성에 있다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진행된 다양한 시민권운동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연방정부가 주도했던 일련의 개혁들, 예를 들어 존슨(Lyndon Johnson) 행정부의 시민권법(1964)과 참정권법(1965) 입법화와 ‘위대한 사회’ 기획은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야기했다. 그런데 이 반발은 인종차별철폐나 빈곤철폐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연방정부의 일방적인 진보주의적 개혁추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적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될 수 있는 상황적 조건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1950~1960년대의 이러한 조건 위에서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운동으로서 영향력이 빠르게 확장되기 시작했고 보수적 씽크탱크의 지원 속에서 정치적 보수주의에 새로운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지식인들의 이념적 네트워크를 넘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정책적 신자유주의’ 시기이다.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배경으로 새롭게 진화한 신자유주의는 정책원리이자 경제학적 이론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와 뷰캐넌(James Buchanan)의 공공선택이론으로서, 이들은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책적 처방까지 제공해주었다. 강조해야 할 사실은 ‘정책적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신자유주의’와 달리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케인스주의의 포기와 통화주의 정책으로의 전환은 1970년대 말 영국의 칼라한(James Callaghan) 노동당 정부와 미국의 카터(James Carter) 민주당 정부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다. 물론 이후 대처(Margaret Thatcher)와 레이건(Ronald Reagan)과 같은 보수주의 정부 시기에 들어서야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은 1990년대에 정권을 탈환한 노동당과 민주당 정부 시기에도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하는 기술관료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는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규범적 신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이다. 이제 신자유주의가 제도정책적 원리를 넘어서 일반 사람들의 일상적 실천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켰음을 의미한다. 특히 초기 신자유주의 이념에서 관찰되었던 개인주의에 대한 강조는 정치적 의미에서 도덕적 의미로 초점이 이동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즉 복지제도와 같은 집단적 대응보다는 삶에 대한 개인의 책임성이 강조되면서,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과 복지의 수혜자들에게 무책임한 개인이라는 규범적 비판이 집중된다. 바람직한 규범적 태도는 개인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며, 노력의 정당한 대가를 인정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개인적 능력, 실력, 혹은 성과에 따른 보상을 의미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적 원칙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역사적 측면 주목해야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 이후,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관료와 정치인들이 주도했던 ‘정책적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던 데 반해,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규범적 신자유주의’는 정책적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대결하면서 빠르게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규범적 신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능력주의와 역량강화는 양가적인데, 한편으로는 기존의 차별과 위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점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결정적 한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비판적 관점에서 ‘진보적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일부 사회운동과 월스트리트, 헐리우드, 실리콘밸리의 결합이 새로운 신자유주의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진화와 관련된 이러한 설명은 아직 가설적 수준이지만, 나는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측면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을 보면, 초기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이론적·철학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치거나, 아니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에서 섣부르게 신자유주의의 파산과 종언을 도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계속 진화해왔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현재에 대한 비판을 과거에 대한 비판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비판의 출발점은 신자유주의의 진화가 신자유주의 그 자체에 진화의 동력이 있다기보다는 외부의 조건, 요컨대 경제적 조건의 변화라든지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모해왔음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제 신자유주의를 ‘통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 신자유주의 그 자체를 설명해야 한다. 

박찬종 충남대 사회학과 조교수
광운대 인제니움학부 조교수와 비판사회학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의 신자유주의 전환과 금융화, 그리고 수출주의 경제에 관해 연구해왔으며, 최근 ‘금융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의 전세제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연구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적 금융화」, 「한국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원」, 「한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으며, 공저로서 『세계화와 사회변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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