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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화폐 발행의 정치학…2024년 일본 신권 발행 감상법
[글로컬 오디세이] 화폐 발행의 정치학…2024년 일본 신권 발행 감상법
  • 이은경
  • 승인 2024.02.21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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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이은경 서울대 일본연구소 HK 부교수

올해 일본에 예정된 빅 이벤트가 있다. 1984년, 2004년에 이은 20년 만의 신권 발행이다. 일본이 여타 국 가에 비해 유독 현금의 사용과 보관 비율이 월등히 높은 나라인 데다, 국민 개인으로서도 평생에 몇 번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이라는 희소성이 더해져, 신권의 발행은 상당한 주목을 끄는 이벤트가 된다. ATM과 자판기 제조 산업의 특수 등이 GDP 상승을 견인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고, 잠자던 ‘장롱예금’이 은행을 향하게 되면 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도 가능해진다.

중요한 이벤트인 만큼 재무성을 비롯한 관련 기관은 긴밀하게 협의하며 장기적으로 그리고 극비리에 이를 준비한다. 여기에는 역사 교과서를 샅샅이 뒤져 후보가 될 인물을 추려내는 것, 위조 방지를 위해 최신의 기술을 축적하고 연마하는 것이 포함된다. 후보를 선정할 때에는 일본 국민이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업적과 높은 지명도를 가질 것, 시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정치인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이래의 ‘문화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하지만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시대’의 변화보다 ‘국경’을 넘을 때 더욱 첨예해지기 마련이고, 정치인을 배제하는 원칙이 정립된 것은 1984년 신권 결정에 즈음해서이니, 뒤늦게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주변국에 환영받지 못할 역사를 가진 일본 나름의 고육지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은, 위조 방지를 위해 정교한 사진 혹은 그림이 입수 가능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신권 발행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지만, 그 안에 들어갈 인물의 선정과 그 시점은 그렇지 않다.

올해 일본은 20년 만의 신권을 발행한다. 일본이 여타 국가에 비해 유독 현금의 사용과 보관 비율이 월등히 높은 나라인 데다, 국민 개인으로서도 평생에 몇 번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이라는 희소성이 더해져, 신권의 발행은 상당한 주목을 끄는 이벤트가 된다. 5천 엔의 주인공은 쓰다 우메코(왼쪽), 1만 엔의 주인공은 시부사와 에이이치이다. 사진=일본 재무부

새 지폐의 인물을 ‘언제’ 즉 올해보다 몇 년 전에 어느 정권의 어떤 재무 장관이 ‘누구’로 확정해 발표할 것인가는, 그야말로 정치적 영역에 속한다. 관료와 기술자들은 총리나 재무 장관이 신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상시 만반의 준비를 할 뿐이다.

그런데 신권 인물의 발표는 발행 대략 2년여 전에 신권의 인물을 공표하는 관례를 깨고, 5년 이상 앞선 2019년 4월에 이뤄졌다. ‘레이와(令和)’라는 새 연호를 발표한 국가적 대사로부터 겨우 일주일 후, 신권 발표를 위해 기자 회견장에 선 것은 아베 정권의 핵심 멤버인 아소 다로(麻生太郎)였다.

아베 정권이 천황의 이른바 ‘생전퇴위(生前退位)’에 이은 황위 계승 의식을 정권의 지지율 상승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신권의 발행도 그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던 셈이다. 당사자들은 신권 발표가 예년보다 이른 것도 새 연호 발표와 일정이 이어진 것도 ‘우연’일 뿐이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일찌감치 자신들의 임기 중에 신권의 인물을 선점해 이른바 ‘아베 레거시’로 삼으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상승했고, 새 화폐가 사용되는 5년 후 다시 한번 같은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됐다. 아베 총리가 여전히 건재했다면 말이다. 배경과 의도가 어떠하든, 오는 7월부터 1만엔 권의 인물은 근대 일본에서 은행뿐 아니라 500여 개 기업의 설립과 육성에 기여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로, 5천엔 권은 당시 메이지 정부가 원했던 현모양처 대신 여성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쓰다주쿠대의 설립과 운영에 평생 헌신해서 ‘일본 여자고등교육의 선구자’로 이야기되는 쓰다 우메코(津田梅子, 1864~1929)다.

1천엔 권은 의사이자 세균학자로서 ‘일본 근대 의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 1853~1931)로 변경된다. 각각은 ‘새로운 산업의 육성, 여성의 활약,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일본(어쩌면 2019년 당시 아베 정권)의 방향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설명됐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신권 발행에 관해 정치적인 각도에서 ‘인물’의 선정을 중심으로 다뤘지만, 사실 주기적인 신권 발행의 가장 큰 이유는 위조 방지다.

20년에 한 번씩 최첨단 기술을 도입한 신권을 발행하면서, 그 기회에 새로운 일본의 얼굴도 선정하는 셈이다. 그런데 2004년 5천엔 권에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라는 24세로 요절한 여성 소설가가 선정되기 전까지, 여성이 지폐 도안에서 배제됐던 명분 중의 하나는 위조 방지를 위해 섬세하게 표현할 ‘수염’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수염이 없는 여성도 채택될 수 있게 되었다지만, 여성 인물에 대한 요구와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더라면 실현되지 않았을 일이다.

오는 7월 일본 신권 발행은 이처럼 첨단 기술의 발전, 사회 인식의 변화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절묘히 결합한 결과물로, 현대 일본의 현주소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흥미로운 창구가 된다.

 

이은경 서울대 일본연구소 HK 부교수

근대 일본의 역사를 여성 인물과 운동을 중심으로 연구해 왔고, 일본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대중적 글쓰기에도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근대 일본 여성 분투기』(한울, 2021)가 있으며, 그 외에 『근대 일본인의 국가 인식』(2023, 빈서재), 『젠더와 일본 사회』 (한울, 2016), 『난감한 이웃 일본을 이해하는 여섯 가지 시선』(위즈덤하우스, 2018) 등 다수의 공저, 그리고 20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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