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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을 발신하며 57년 동안 쌓아올린 지성의 탑
담론을 발신하며 57년 동안 쌓아올린 지성의 탑
  • 김병희
  • 승인 2023.07.0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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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5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1966년 1월 15일,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창간됐다. 1982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영인본을 판매하는 서적 외판원의 권유로 거금을 주고 10권 전질을 샀다. “창비를 읽지 않으면 군부독재 시대의 대학생이라 할 수 없어요.” 대학 신입생이 시대의 아픔을 알면 얼마나 알았을까.

그런데 서적 외판원의 화술은 지적인 겉멋도 슬쩍 끼어든 갓 신입생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영인본 창간호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글은 백낙청 교수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라는 권두 논문이었다. 

“서구처럼 중산층이 발달한 적이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순수문학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한국의 순수주의는 권위주의와 비생산성, 족벌주의, 관권 등 조선 양반 계급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수문학만이 진짜 문학이라 생각하던 나는 문학의 현실 참여를 촉구한 이 글을 읽으며 마치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창조와 저항의 거점이 필요하다니? 저항 담론의 산실이자 참여문학의 거점을 지향하는 잡지의 성격을 요약한 문장이었다.

문우출판사의 <창작과 비평> 제1권 제2호 광고를 보자(동아일보, 1966. 4. 29.). 광고비가 없었던 탓이었는지 제1호 창간호 광고는 찾을 수 없었다. 당시에 28살의 서울대 전임강사이던 백낙청 선생이 자기 집에서 편집했고, 사립대의 한 학기 등록금이 3만원 하던 시절에 거금 9만 원을 들여 초판 2천 부를 찍었다고 한다.

광고에 나타난 제2호의 목차는 이렇다. 임종철의 「경제이론의 시녀성과 객관성」, 이정식의 「한국 정치학의 표(表)와 리(裏)」, 허버트 마르쿠제의 「부정적 사고능력」, 어빙 하우의 「정치와 소설」 같은 논문과 평론에 이어, 서기원의 「아리랑」, 한남철의 「검은 파도」, 박태순의 「연애」 같은 창작 소설은 물론, 정상호의 「김승옥론」과 백낙청의 「문명비평의 문제점」 같은 서평이 실렸다. 깨알 같은 글씨에 창간호는 132쪽, 2호는 111쪽, 3호는 121쪽을 책값 70원에 발행했다. 

문우출판사의 <창작과 비평> 제1권 제2호 광고(동아일보, 1966. 4. 29.)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의 주목을 끌며 조금씩 독자를 늘린 <창작과 비평>은 우리나라에서도 고급 계간지가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지성의 씨앗을 뿌려 지금은 200호를 발간한 장수 계간지가 됐다. <창작과 비평>을 처음부터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창간호부터 7호까지는 문우출판사에서, 8호부터 14호까지는 일조각에서, 15호부터는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했다.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고, 1985년에는 출판사 등록이 취소됐으며, 1988년에 다시 복간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잡지를 모은 영인본이 인기를 얻었을 만큼 지성인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운암사의 <창작과 비평> 영인본 광고를 보자(한겨레, 1990. 5. 30.). 영인본 광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써서 잡지의 가치를 알렸다. “양심과 용기로 민중의 현실을 증언하고 민족·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온 창작과 비평!” 창간호부터 1988년 겨울호(62호)까지를 합본한 영인본이었다.

보디카피에서는 “발간될 때마다 문단·지식인·일반 독자층에 공전의 화제를 모으면서 우리 현실의 구체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타개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논의”를 다양하게 수록한 23년 역사를, 모두 15,683 페이지의 미색 보안용지에 영인해 29권의 합본 양장본으로 펴낸다고 밝혔다.

운암사의 <창작과 비평> 영인본 광고(한겨레, 1990. 5. 30.) 

일반 문예지가 아닌 사회비평 종합지를 표방한 <창작과 비평>은 서슬 퍼런 군사 독재에 짓눌려 있던 청년과 지식인에게 죽비소리를 울리며 이 땅에 고급 계간지의 시대를 열었다.

1980~199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이 잡지를 안고 다니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요즘 말로 소개팅 하는 자리에도 일부러 창비를 끼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민중의 사회적 현실을 비롯해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에 고통을 느끼던 모든 이에게 창비는 깊은 영향을 미쳤다.

창비에서 제시한 민중의 실체가 다소 관념적이라며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지식인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촉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창비는 196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전환을 위한 담론(談論) 발신의 장을 제공하면서 한국 사회가 건강하게 진보해야 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최근에 <창작과 비평>은 200호(2023년 여름호)를 펴냈다. 창간 이후 57년 동안 쌓아올린 지성의 탑이다. “비현실적인 이상에 자족하지 않고 그렇다고 현실을 추수하지도 않으면서 변혁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창비 담론의 핵심”이라는 이남주 편집주간의 말처럼, 앞으로도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함)의 정신을 바탕으로 날로 새로운 시대의 표정을 제시하는 <창작과 비평>의 내일을 기다린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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