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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지구 가치사슬에서 살아남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지구 가치사슬에서 살아남기
  • 최승우
  • 승인 2023.07.14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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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를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부터 동아시아,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과 담론을 인문·사회·자연과학이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17일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과)가 「시장과 경제의 세계화와 탈세계화」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6강은 이재승 고려대 교수(국제대학원)의 「에너지 안보의 국제 질서」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국가가 왜곡된 자원 배분을 시정하는 데 주저할 때 그 결과는 과도한 경쟁 원리에 의해 분배 구조의 공정성과 형평성의 악화로 나타난다. 최근 세계화에 따른 국가나 국가 내부의 사회경제적 양극화 문제도 바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기인하고 있다.

최근의 세계는 인류의 화합과 공존보다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촌’이 ‘약탈로 가득 찬 지구’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이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지구 곳곳에서 문화충돌, 종교 대립, 민족 갈등, 인종 분쟁, 식량 갈등, 난민 봉쇄 아래 전쟁, 폭력, 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빈곤, 기아, 압제가 심화되었다. 

특히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세계화는 지구 가치사슬의 혼란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작금의 전 지구적 경제, 자원, 환경 등 복합적 메가위기에 따른 불안과 혼란은 국가의 복귀와 사회의 위축 아래 시장이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세계화를 국가 발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냉철히 인식해야 한다. 국제 무대에 참여하지 않으면 번영은커녕 생존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작금 세계사의 거역할 수 없는 조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방·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중국과 베트남의 발전과 그렇지 못한 북한과 쿠바의 저발전은 과거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내부의 응전이 갖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도 1890년대 개항, 1910년 식민지화, 1945년의 해방, 1997년 외환 위기, 2007년 경제 위기 당시의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작금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라는 거대한 지구인류적 변환에 대해 선취적이고 전향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과)는 “지구 가치사슬에서 ‘글로벌’은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모두 지칭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이라는 뜻의 지리적 규모를 지칭한다면, 다른 하나는 ‘포괄적’, ‘전체적’을 뜻한다”라며 “‘한국 주식회사’에서 정부와 기업 사이의 주종 관계의 변화가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반주변부라는 중간 위치를 통해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의 상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증해줬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과)는 “지구 가치사슬에서 ‘글로벌’은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모두 지칭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이라는 뜻의 지리적 규모를 지칭한다면, 다른 하나는 ‘포괄적’, ‘전체적’을 뜻한다”라며 “‘한국 주식회사’에서 정부와 기업 사이의 주종 관계의 변화가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반주변부라는 중간 위치를 통해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의 상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증해줬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나는 한국이 세계화의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나라에 비해 발전 전략을 비교적 잘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방화된 세계 경제 아래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통해 지구 가치사슬에서 조립 가공에서 생산 수출로 이동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여왔다. 노동집약적 소비재 생산에서 기술집약적, 나아가 지식집약적 자본재 생산으로 입지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급속한 경제 성장은 권위주의의 등장과 민주주의의 유보를 전제했다. 작금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통해 공고화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국이 제3세계 지평에서 볼 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간적·물리적 고통과 희생이 따랐음을 지적해야 한다.

세계화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마주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지향적 사회과학자들은 세계화가 이미 수천 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화는 역사적으로 11세기경 중동과 중국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당시 유럽의 역할은 미미했다고 추측된다. 아부 루고드는 동서양의 교역 관계에서 볼 때 중동의 위상과 중국의 역할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유럽은 16세기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19세기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서세동점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화를 주도하게 됐고,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미국이 유럽을 대신해 주도권을 행사해왔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중심의 단극 세계 질서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무극(無極) 혹은 비극(非極)의 관점에서 세계 무질서의 미래가 운위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이 부상하고, 유럽이 쇠퇴하면서 헤게모니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G2의 대열에 중국이 유럽을 대신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문명사적으로 아시아가 서구적 근대성에 대해 대안으로까지 언급되고 있기까지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국민국가 사이의 상호 연관과 작용의 정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면서 범지구적 차원에서 좁아지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의 추세는 한편으로 EU, NAFTA, ASEAN, RCEP, CPTPP, IPEF, MERCOSUR 등과 같은 지역주의 형태의 초(超)국가주의의 대두와 다른 한편에서 구소련, 구유고, 캐나다, 스페인, 멕시코 등에서 인종, 종교, 언어에 입각한 분리주의의 의미를 갖는 소(小)민족주의의 등장이라는 통합과 분화의 모순적 동태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이 세계는 그 구성단위 사이에서 한편 상호의존이 늘어나면서도 다른 한편 생존 경쟁이 심해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즉, 세계는 통합적일 뿐만 아니라 분열적인 이중적 역학 아래 협력과 갈등, 타협과 반목을 나타내고 있다.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볼 때 세계화의 와중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화는 한 나라의 발전을 보는 데 정부의 역할보다 시장의 기능을 중시한다. 일종의 시장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국가를 개방하고 시장에 의존하라. 그러면 천년 왕국이 도래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선진국과 후진국을 불문하고 신자유주의가 선호되고 있는 것도 생산과 투자를 국가 개입이 아니라 시장 기제에 맡기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무역, 시장개방, 조세 감면, 기업 지원, 외자 유치, 규제 완화, 복지 축소, 탈국영화 등이 강조된다.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국가로 하여금 노조를 배제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기치로 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중시한다. 

또한 복지를 철회하고 개인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사회적 안전망을 최소 수준으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국가가 왜곡된 자원 배분을 시정하는 데 주저할 때 그 결과는 과도한 경쟁 원리에 의해 분배 구조의 공정성과 형평성의 악화로 나타난다.

최근 세계화에 따른 국가 사이나 국가 내부의 사회경제적 양극화 문제도 바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기인하고 있다. 이에 자본주의의 보호막으로서 민주주의가 참여와 평등보다 경쟁과 축적의 이념으로 변색하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지구 시대의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와 시장경제의 의미로 협애화(狹隘化)되고 있다. 결국 권력과 지식의 지구적 결합으로서 신자유주의가 오늘의 세계화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서구적 의미의 제2근대화를 위한 정보 지식 사회에 기반한 과학기술적 해결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지구 가치사슬에서 ‘글로벌’은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모두 지칭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이라는 뜻의 지리적 규모를 지칭한다면, 다른 하나는 ‘포괄적’, ‘전체적’을 뜻한다. 초기 이론가들이 두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방식으로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후 세계화에 대한 관심에서 지구 가치사슬 개념에 접근한 연구자들은 대체로 전자의 의미에 관심을 집중했다. 

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가치사슬이 전 세계적이라면,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 가치사슬의 지리적 규모가 늘 전 세계적일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은 일국적이거나 더 좁게 국지적일 수도, 어떤 것은 지역적 또는 소지역적, 어떤 것은 말 그대로 전 지구적일 수 있다. 세계 체제론은 발전과 저발전을 중심과 주변의 역학에 의해 설명하는 대표적인 외인(外因)론적 접근이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 안에서 중심과 주변은 불변의 위상을 지닌다. 중심에 속한 나라들은 우월한 산업 능력에 의해 국제적 분업 속에서 항시 주변부를 착취한다. 

다만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중심과 주변의 경제 활동을 혼합하여 주변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나 상승시킬 수 없는” 제한된 능력을 지니는 반(半)주변부(semi-periphery)가 존재한다. 이러한 반주변부는 세계 체제 안에서 구조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위치 변화를 가능케 하는 동태적 관점을 역설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주식회사’에서 정부와 기업 사이의 주종 관계의 변화가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반주변부라는 중간 위치를 통해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의 상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증해줬다.

나는 원래 지구 가치사슬을 제3세계에 적용하는 데 비판적이었다. 초국적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초기에는 임금이 싼 지역에서 후기에는 환경에 대한 규제가 덜한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제3세계가 반주변부로 올라가기에는 초국적 기업에 의한 착취와 함께 환경파괴, 노동 억압, 저임금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초국적 기업의 원활한 기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제3세계에는 개발 독재 아래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곤 했다.

발전주의 국가는 그러한 권위주의 정권 아래 재량적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권위주의 정권이 발전주의 국가로서 산업의 고도화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지적했듯이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산업화에 성공한 경우도 드물었지만 민주화로 이어진 사례는 더욱 드물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브라질만 하더라도 경제 성장은 간헐적으로 이뤄졌고, 더욱이 소득 분배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비록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져왔지만 아직도 일부 가문이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족벌 권위주의 국가라 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지속적 경제 발전에 성공적이었지만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의 단계에 도달해 있지 못한 일종의 일당 독재 국가이다. 대만은 선거 민주주의의 단계를 넘어 경제 발전에서도 성공적인 발전주의 국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은 대만에 비해 산업의 고도화를 통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의 공고화 이후 여전히 법치주의, 삼권분립, 지방 분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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