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82. 10. 29.)
우리는 성장소설 혹은 동화적인 이야기에 왜 자꾸 관심을 가질까? 몸은 비록 성인이 됐을지라도 마음속에 오랜 상처가 남아 있다면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러 동화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동화적 상상력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 다시 힘을 얻는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1968년, 브라질의 국민 작가 J. M. 바스콘셀로스(1920~1983)는 라임오렌지나무라는 동화적 이야기를 선보였다. 그는 착한 아이의 성장 과정을 단지 보여주는 것을 넘어 상처받은 아이가 자기 마음을 어떻게 지켜 내는지 생생히 묘사했다.
동녘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광고에서는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쓰며 주인공 제제의 모습을 삽화로 제시했다(동아일보, 1982. 10. 29.). 본문으로 유도하는 리드 카피는 이렇다. “잃어버린 언어, 잃어버린 리듬, 잃어버린 교감의 세계의 찬란함을 보여드립니다!” 그 아래에는 이런 보디카피가 바로 이어진다. “가슴 속에 작은 새와 짖궂은 악마가 숨어 사는 총명한 브라질 꼬마 ‘제제’의 비밀스런 벗 라임오렌지나무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밀어는 이 가을에 여러분을 혼탁한 대기를 떠나 산속 물 같은 순수의 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책 광고의 기본 구조를 지키며 네모 칸에 제목을 기울어지게 배치했다. 대체로 잘 만든 책 광고이지만 “짖궂은”(짓궂은) 같은 오자가 발견되니 아쉽다. 박동원 번역으로 1982년 5월 30일에 초판을 발간한 234쪽의 책값은 2,000원이었다. 2022년에는 초판의 오역 부분을 대대적으로 고친 40주년 기념 특별판이 출간됐다.
바스콘셀로스의 대표작이자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제제는 브라질 변두리의 가난한 집에서 성장한다. 늘 비좁은 집에서 마음은 더 비좁게 살아가는 가족의 생계가 무너지자, 집 안의 공기는 더 싸늘해진다.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른들은 이유 없는 짜증과 분노로 아이에게 화풀이한다.
소설에서는 누구 하나를 악인으로 만들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를 피로와 결핍에 빠진 인간으로 만들면서도 쉽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문제아이자 장난꾸러기인 제제는 너무 예민한 성격이라 남모르는 슬픔을 느끼며 쉽게 상처받지만, 그 상처를 견뎌내려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마당에 있는 작은 라임오렌지나무는 제제의 친구가 된다. 제제가 말을 걸면 나무가 응답하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의 구조를 띤 소설이다.
제제가 우연히 만난 포르투가라는 중년 남자가 등장함으로써 소설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제제를 훈계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고 먼저 존중한다. 누군가의 따스한 눈빛을 처음으로 받아 본 제제는 사랑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제제는 동화적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시 마주친 상실의 과정을 통과하며 자라난다는 것이 기쁨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운다. 상실 이후에 겪는 성장은 성공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상실 이후에도 세계와 다시 관계를 맺는 용기를 잃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제제에게 포르투가는 단순한 어른이 아니라, 처음으로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준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바람 불면 흔들리면서도 그늘을 내어주는 라임오렌지나무가 우리 마음속에 작은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격하게 때릴지라도 스스로 자신을 미워하면 절대로 안 되며 끝까지 희망을 품고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이 소설은 지금 읽어도 정서 교육에 필요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세월이 흘러도 세대가 달라져도 소설이 계속 읽히는 까닭은 한 시대의 유행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기본 감정인 두려움, 외로움, 기대, 애정 같은 문제를 정직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나이가 달라지면 이 책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에는 제제의 눈으로 세상을 봤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포르투가의 배려와 선행에 눈길이 간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가 불안하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도 알려준다. 제제의 가족은 제제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할 능력이 부족했던 사람들이다.
소설에서는 가난과 폭력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비틀어 놓는지 현미경처럼 보여준다. 제제의 웃음은 어두운 마음이 들킬까 봐 일부러 애써 웃기려 하는 가면의 웃음이다. 가면의 웃음이나 농담이란 어쩌면 슬픔을 숨기기 위한 포장에 가까울 수 있다.

소설에서는 선한 의지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부각한다. 포르투가의 다정함에도 불구하고 제제의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의 분노는 자동으로 치유되지 않을지라도, 한 사람만이라도 친절하게 대한다면 동심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한다. 아이들은 하루하루 자라거나 아니면 조금씩 닳아갈 수 있다. 따라서 아이들이 견딜 수 있는 속도로 어른들이 옳게 변하고 있는지 깊게 성찰해 봐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 준 적이 있는지, 혹은 누군가의 그늘을 밟고 지나가지는 않았는지, 소설의 끝부분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른들은 또 다른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성장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나만 살아남는 법이 아닌 누군가가 살아남도록 돕는 법을 찾아봐야 한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도 그늘을 내어주는 라임오렌지나무는 결국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작은 피난처를 상징한다. 제제가 그 나무와 포르투가에게서 배운 것은 세상이 자신을 때려도 스스로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가능성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가능성에 기대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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