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표준영정과 다른 강직한 캐릭터… 전쟁에 대한 최고 기록 남겨
“꽃비에 젖었다” 문학적 수사 즐기고 완성도 높이려 여러 번 고쳐
사실에 충실한 보고서의 달인… 手決은 추상표현주의 작품과 비슷
광화문에 나갈 때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그에 관한 글을 읽고, 그의 무대인 남해를 돌아보고, 그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봐 제법 익숙할 법 하지만 여전히 아득하게 느껴진다. 저 양반이 저기서 뭐 하고 있나 싶다. 이유는 그의 삶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정치가, 전략가, 경영자, 발명가, 문장가에 이르는 복합 캐릭터는 역사에 드문 케이스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데는 초상화도 한몫한다. 이순신의 실체를 담은 그림이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공신이 되면 초상화를 그려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생전에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고, 사후 초상화는 무슨 연유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은 근대 화가들이 문헌과 전승을 바탕 삼아 만들어 낸 상상의 결과물이다. 초상에다 목상(木像)까지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교된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리들의 이순신’ 전에는 세 가지 초상이 출품돼 있다. 하나는 1932년 현충사 중건 낙성식 때 청전 이상범이 그린 영정이다. 짙은 눈썹,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 지휘봉을 쥐고 있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은 이상범 그림과 비슷한 구도이면서도 수군조련도(水軍操鍊圖)라는 병풍을 두르고 있다. 그림 제목은 ‘푸른 옷을 입은 무인’이다.
세 번째가 화폐에서 익히 본 그림이다. 월전 장우성이 초상화 전통에 따라 인자하게 그렸다. 라운드 넥 모양의 관복에다 흉배(胸背)를 단 대감의 얼굴을 담다 보니 바다에 삶을 던진 제독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월전은 아무 생각 없이 용맹한 장군을 온화한 문신으로 그렸을까. 아니다. 임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의 책 『징비록』을 옆에 두고 붓을 잡았다.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고 조심스러워 마치 수행하는 선비 같았다. 마음속에는 담력이 있어 자기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의 운명에 ‘재주는 있으나 명이 없다’(有才無命)하여 백 가지 중에 하나도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애석하도다.” 이순신을 발탁하고 지지했던 서애였으니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다. 애초에 객관적이고 냉정한 인물평은 기대하기 어려운 관계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보이지 않지만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상’도 있다. 그림 제목과 달리 이순신 초상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에 나오는 복식이 『난중일기』에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이엄(耳掩)과 맞아떨어지고, 이순신의 무과 동기생인 고상안의 진술과도 부합하니 영 아닌 그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연부역강한 학자들이 후속 연구를 통해 충무공과의 연관성을 밝혀내면 좋겠다.
이제 이순신의 글을 만날 차례. 사실 그는 일기와 서간문, 공문서까지 수많은 자료를 남긴 기록광이다. 세상에 어느 장군이 이렇게 글쓰기를 즐겼을까 싶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로 시작되는 시조에서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愼勿言我死)’는 유언까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그러니 글 몇 편을 올려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기가 민망하고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이 불후의 텍스트를 그냥 넘길쏘냐. 내친김에 거칠게 정리하면 스토리를 극도로 압축하는 스타일이 이순신 문장의 핵심이다. 요즘으로 치면 SNS용에 가깝다고 할까.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듣고 남긴 글이 ‘軍敗 痛憤’이다. 져서 원통하고 분하다. 1592년 5월 옥포해전을 앞둔 날의 기록은 ‘風便 乃進’이다. 바람이 좋으니 나아갔다. 다음 날 승리를 거둔 뒤에 ‘賊船 焚燒’이라 적었다. 적선이 불타다.

나는 이런 단문을 두고 무과 급제자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문과에 거듭 낙방해 무과로 전향했다는 설명도 그런 의심을 부추겼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문신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하다가 22세부터 무예를 닦아 32세에 무과에 합격한 이력이 있다. 글 공부의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예의 그 짧은 문장은 전쟁을 기록하는 데 최적화된 문장이었다.
일기나 편지와 같은 사적 글쓰기와 보고서류의 공적 글쓰기를 엄격히 구분한 점도 특징이다. 『난중일기』는 일기의 은밀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과를 적으면서 꿈에서 여인의 유혹을 물리친 이야기, 술을 과음한 일, 아파서 드러누운 사정, 다른 장군을 까는 뒷담화까지 가감 없이 적었다. 나중에 누가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썼는지, 개의치 않고 마구 적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문학적 감성도 풍부했다. “비가 많이 쏟아졌다. 일행이 다 꽃비(花雨)에 젖었다.”(1592년 2월23일) “달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출렁이는 물빛은 하얀 비단 같았다. 마음을 가눌 수 없다”(1593년 8월17일) “석양을 타고 돌아왔다(乘夕還來)”(1592년 2월 12일)에서 보듯 사용하는 어휘가 다르다.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기저기 다듬고 고치는 교열자의 열정도 볼 수 있다.
1597년 10월 14일자 일기에는 사무치는 마음이 담겼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투를 뜯지도 않았는데, 뼈와 살이 먼저 떨렸다. 마음도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겉봉투를 와락 펼쳤더니, (둘째 아들) 열의 글씨가 보였는데, 바깥에 ‘痛哭 痛哭’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음속으로 (막내 아들)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졌다. 목 놓아 소리 높여 슬피 울부짖었다. 하늘이 어찌 이토록 모진가. 간담이 타고 찢어졌다. 불쌍한 내 어린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하룻밤이 1년 같구나.” 이건 문학이다.
이런 이순신의 문장이 공적 글쓰기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장계(狀啓)인데, 5W 1H에 충실한 지휘관의 보고서다. 널리 알려진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를 보면 ‘今臣’에서 시점과 주체를 밝히고, ‘尙有十二’에서 전술적 근거를 제시하며, ‘出死力拒戰’에서 의지를 밝힌 뒤 ‘則猶可爲也’로 판단하는 순서로 꾸몄다. 결재권자가 가장 선호하는 구조라고 한다.
1593년 8월에 올린 ‘封進火砲狀’은 어떤가. 서론에서 조총(鳥銃)을 제작한 이유를 말한다.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분해해 보니 몸체가 길어 파괴력이 큰 데 비해 몸체가 짧은 우리 총통의 문제점을 적시한다. 본론에서는 조총을 개발한 과정과 성능을 자세히 설명한 뒤 전력 강화를 위해 전국적인 보급을 건의한다. 마지막으로 조총 다섯 자루 보내면서 공로자(군관 정사준과 대장장이 이필종)에 대한 표창을 상신한다.

글의 마지막에는 수결(手決)이 있다. 수결은 글의 완성을 나타내는 사인 혹은 서명이다. 1592년 난중일기 뒷장에 ‘一心’이라는 수결을 연습한 흔적이 남아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수없이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순신 연구자인 박종평 박사는 “한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에 충성한다는 다짐을 쓴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수결은 조형성도 뛰어나 박물관이 만든 에코백을 보니 잭슨 폴록의 작품처럼 세련미가 느껴졌다.
이순신의 문장은 군인의 성정을 보여주는 간결함, 팩트에 대한 존중, 수정과 교열을 통해 높아진 완성도, 수사적 표현을 능숙하게 구사한 문학성을 바탕으로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장군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글에 대한 치열함이 그의 삶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450년 저편의 영웅과 문장을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눌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으랴.
편집인·언론학 박사 shonsuho@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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