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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성찰’로 과학 더 깊이 이해하기
‘철학적 성찰’로 과학 더 깊이 이해하기
  • 강형구
  • 승인 2023.07.12 0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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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45 과학을 성찰하는 연구
강형구 국립대구과학관 선임연구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자연과 과학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리 과학이 경험적으로 성공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메타적 성찰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과학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과학의 역사와 철학은 그 자체로 표준적인 과학 활동과는 독립적이면서도 과학과 자연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과학이 발전해온 이야기, 과학의 개념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따져 물어온 이야기에서 과학과 자연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사람들의 미약하나마 끈질긴 전통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는 일은 위안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자연을 이해하는 한 방식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아인슈타인이 쓴 『상대성 이론 : 특수 이론과 일반 이론』(1916년)과 말년의 자서전적 글을 읽었다. 그렇지만 거듭 읽어봐도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 서점에서 한스 라이헨바흐(1891~1953)라는 과학철학자가 쓴 『시간과 공간의 철학』(1928년·1958년)을 발견했다. 그 책은 개념적 차원에서 아인슈타인의 글보다 더 직관적이고 섬세한 논의를 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글과는 다른 차원에서 심오했다. 라이헨바흐가 과학자도 철학자도 아닌 ‘과학철학자’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시간과 공간의 철학』(1928년)은 시간과 공간의 철학적 의의를 체계적으로 논하면서 통일장 이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담고 있다.

흔히 라이헨바흐는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로 분류된다. ‘논리경험주의의 죽음 혹은 몰락’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논리경험주의 이후의 새로운 과학철학’에서도 상대성 이론에 관한 라이헨바흐의 철학적 논의만큼 깊이 있는 분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논리경험주의의 비판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표준적 견해’라는 것도 과연 라이헨바흐의 입장과 같은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19세기의 과학자 중에는 철학적 성찰을 동시에 진행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베른하르트 리만(1826~1866),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 에른스트 마흐(1838~1916), 앙리 푸앵카레(1854~1912) 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이들에게 ‘철학적’으로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 특히 흄(1711~1776)과 칸트(1724~1804)였다.

상대론적 시·공간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적 해석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관해 중요한 개념적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그는 일반 상대론을 종합하는 1916년 3월 논문에서, ‘일반 공변성(general covariance)’을 추구한 결과 시간과 공간에 남아 있던 ‘물리적 객관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일반 공변성이란 물리 현상에 관한 법칙이 법칙을 서술하는 기준계와 무관하게 똑같은 수학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공간 좌표는 물리적 사건에 대한 측정 결과를 반영하기보다 물리적 사건에 임의로 붙이는 이름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객관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따라서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다소 과격한 주장은 이론의 경험적 성공을 넘어서는 일종의 ‘철학적 해석’이었다.

모리츠 슐리크(1882~1936), 루돌프 카르납(1891~1970), 한스 라이헨바흐(1891~1953) 등 논리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세 철학자들은 이처럼 과학적 이론과 철학적 해석이 착종된 상황을 날카롭게 인식했다. 상대론에 대한 그들의 심도 있는 철학적 분석은 그런 인식의 결과였다.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1891~1953). 경험주의 관점에서 20세기 물리학의 인식적 의의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중 논리경험주의 시간과 공간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바로 라이헨바흐다. 그는 1919년 아인슈타인이 베를린대학에서 발표했던 최초의 일반 상대론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후 평생 아인슈타인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철학적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당대의 한 철학자는 그를 ‘아인슈타인의 불독’이라 비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라이헨바흐의 시간과 공간 철학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그의 철학적 분석 결과가 상당 부분 아인슈타인의 해석 및 지향과 달랐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는 그가 자신의 교수자격 취득논문으로 제출한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1920년)에서부터 드러나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 헌정한 이 논문에서 라이헨바흐는 상대론으로 인해 칸트가 ‘선험적 종합’이라 여겼던 원리들(공간의 유클리드적 특성, 시간의 보편성 등)이 성립하지 않음이 밝혀졌으므로 과학의 인식론은 칸트처럼 ‘이성’을 분석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뉴턴 역학과 거기에 토대를 둔 칸트의 비판 철학 모두를 의문에 부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 원리가 아닌 새 ‘선험적 종합’ 원리를 제시한 것인가? 라이헨바흐는 상대론 분석을 통해 이러한 새 원리를 밝히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칸트와 라이헨바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칸트는 ‘이성’을 철학 고유의 분석 대상으로 삼아 그 분석(비판) 결과를 정밀과학의 단단한 토대(선험적 종합)로 제시했지만, 라이헨바흐는 과학과 구별되는 철학 고유의 분석 대상이라는 개념을 포기했다.

과학철학자 역시 과학자와 함께 분석 대상인 과학 지식을 공유하며, 오직 철학적 분석과 해명으로 과학 지식의 ‘의미’를 밝힌다는 점에서 과학자와 차별화될 뿐이다. 그런데 분석 대상인 과학 지식은 역사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철학적 분석을 통해 과학 지식이 명료화되고 계층화될 수 있어도 그 속에 칸트가 생각했던 ‘선험적 종합’ 원리는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과학 지식의 분석을 위해 라이헨바흐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했다. 아인슈타인은 철학적 분석과 물리학적 직관을 결합하여 혁신적 이론을 개발했지만(‘발견의 맥락’), 이 이론의 경험적 성공과 별개로 그 인식적 의의에 대한 ‘해명’은 충분하지 않았다.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1924년)는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의 의의를 구체적인 경험적 명제들 과 임의적 규약을 결합해 재구성했다.(

그렇기에 철학자는 ‘정당화의 맥락’에서 이론의 인식적 의의를 상세하게 해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1924년)와 『시간과 공간의 철학』(1928년)은 그러한 철학적 해명의 요청에 대한 라이헨바흐의 응답이었다.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일반 상대론적 상황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위상적 질서는 유지되며, 그렇기에 여전히 시간과 공간 질서는 객관적이며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설혹 텐서 해석이라는 난해한 외투를 쓰고 일반 공변성을 만족하는 중력장 방정식이 주어지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경험적 질서가 물리적 객관성을 잃지는 않는다. 이는 일반 상대론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객관성이 상실되었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라이헨바흐의 철학적 ‘교정’이었다.

과학과 함께했던 ‘철학적 성찰’

20세기 전반기의 논리경험주의 철학을 통해 제시된 상대론적 시공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과학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리 과학이 경험적으로 성공하더라도 과학에 대한 메타적 성찰은 그러한 성공과 독립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과학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그런 해석이 간혹 과학 그 자체의 발전에도 기여하기도 한다.

‘논리경험주의의 죽음 혹은 몰락’에 대한 소박한 의심에서 출발한 연구는, 20세기 과학에 대한 논리경험주의의 철학적 작업이 갖는 의의가 과학철학계 내에서 최근까지도 정확히 평가되지 않았다는 더 큰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는 논리경험주의 철학의 역사철학적 재구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논리경험주의의 양자역학 해석, 논리학, 확률론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앞으로도 과학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 과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과학에서의 혁신을 장려할 것이 분명하다. 20세기 초엽 과학 연구의 세계적 최전선에서 새로운 과학철학의 열정이 태동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20세기 후반 과학 추격국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한국에서도 새로운 과학철학적 정신이 생겨날 역사적 조건이 형성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강형구 국립대구과학관 선임연구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1891~1953)의 시간과 공간 철학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한국장학재단과 대구과학고등학교에서 일했고, 경상국립대 철학과에서 강사로 과학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 등 7권의 책을 번역했고,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분석과 물리적 지식의 인식론」 등 9편의 논문을 썼다. hgkang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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