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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고 있는 그런 ‘가해자다움’은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런 ‘가해자다움’은 없다
  • 이미선
  • 승인 2023.11.22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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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심리학을 외치다_ 일곱 번째 주제 ‘법에도 마음이 있다’④ 
이미선 동양대 경찰범죄심리학과 교수

‘내 삶의 심리학 마인드’와 <교수신문>이 함께 ‘세상의 중심에서 심리학을 외치다’ 공동 기획을 마련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주제탐구 방식의 새로운 기획이다. 한 주제를 놓고, 심리학 전공 분야의 마음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과 분석을 통해 독자의 깊이 있고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마음 전문가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몸과 MBTI, 학교 정글, 중독에 빠진 대한민국, AI시대의 심리학, 웰에이징 시대에 이어 일곱 번째 주제로 ‘법에도 마음이 있다’를 다룬다. 이미선 동양대 경찰범죄심리학과 교수의 네 번째 글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얼마나 고상한 취미와 
성품을 가졌는지 역시 범죄자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범죄자는 오로지 그의 범죄 행동으로 판단된다. 
가해자다움은 없다. 

“그 사람 진짜 사이코패스지?”

몇 달 전 이야기이다. 언니와 나는 전화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자매가 함께 아는 사람 중 가장 악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 그 사람 진짜 사이코패스지?” 최근 들어본 언니 목소리 중에 가장 격양되어 있었다. 

“어…, 근데 사이코패스는 아니고…. 성격장애인 거 같….”
‘뚝….’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를 걸 새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야, 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이코패스지, 그 사람이 어떻게 사이코패스가 아니야?” 그렇게 한바탕 쏘아붙이고는 또다시 전화를 끊었다. 우리 자매는 뭐, 문제없다. 아마 그러고 몇 시간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통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화의 주인공인 그 사람은 내가 알았던 사람 중 가장 ‘악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사실 ‘악한 사람’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주 못되고 나쁜 단어를 쓰고 싶지만…. 그저 ‘악한 사람’ 정도로 하자.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적어도 사이코패스 진단 도구인 PCL-R에 따르면 그렇다. 하지만 언니에게, 사실 나에게 있어서도 그 사람은 사이코패스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그 사람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유정은 왜 사이코패스이어야 할까?

2023년 5월 부산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피해자는 시신이 훼손된 채 여행용 가방에서 발견되었다. 23세 정유정.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이후 모든 언론은 정유정 살인사건 기사로 잠식되었다. 수사를 통해 알려진 범행 수법, 정유정의 말 한마디, 검증되지 않은 전문가의 인터뷰 내용은 ‘단독’이라는 이름을 붙여 호외(號外)가 되었다. 대부분 정유정이 얼마나 잔인하며, 악마와 같은 모습을 보였는지 등 자극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에 500건 이상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정유정 사건은 다른 살인사건과 무엇이 달랐을까. 왜 대중과 언론은 정유정 사건에 그토록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대중의 충격은 살인범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공개된 범인의 얼굴은 주변에서 또는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한 번쯤 봤을 법한 평범한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이렇게 평범한 여성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지?’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는 정유정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머그샷이 공개된 이후, 포토샵 놀이가 유행할 정도로 멀쩡하게 생긴 피의자 정유정. 그녀가 가해자처럼 보이는가?

가해자다움, 그 허상에 대하여 

“뿌린 만큼 거둔다.” 
이 속담을 믿는 순간 세상은 꽤 살만한 곳이 된다. 내가 열심히 하면 성공하는 것이고,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위험한 곳에 가지 않은 이상 나에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공평한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은 우리에게 거짓된 안정감을 준다. 

‘피해자다움’이라는 용어가 있다. 피해자다움이란 피해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행동을 의미한다. 2018년 한 정치인의 성폭행 사건 재판과정에서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행동했는지가 쟁점이 되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우리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범죄자에 대해서도 ‘가해자다움’을 상정한다. 예를 들어, 가정환경이 불우하거나, 사이코패스이거나, 더 간단하게는 관상은 과학이므로 그냥 딱 보면 안다. ‘가해자다움’은 꽤 유용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만 피한다면 범죄로부터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사이코패스이어야 한다. 사이코패스는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안전하다. 

우리는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과 고정관념에 근거하여 피해자의 행동이나 모습을 상정하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경우 “피해자답지 못하다”라는 이유로 피해자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가해자다움’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는 가해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고통은 가중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겉모습만으로 가해자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영화 「지킬박사와 하이드」(1931) 포스터다. 

범죄자는 성별이나 외모로 판단할 수 없다

어느 가정폭력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피해자는 결혼 생활 동안 자신의 배우자로부터 지속해서 정서적·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했다. 가해자는 사소한 일에도 빈번하게 그리고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했고, 심지어 어린 자녀를 안고 있는 피해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피해자는 오랫동안 무기력했으며, 이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들이 이혼하게 된 사건 내용은 이렇다. 그날도 부부싸움이 있었고, 결국 사소한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끝났다. 며칠 후 가해자는 손목이 아프다며 병원에 갔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바지 주머니를 잡고 흔드는 과정에서 넷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골절된 것이다. 의사는 어떻게 생긴 상처냐고 물었고 가해자는 머뭇거리다 겨우 넘어져 생긴 상처라 이야기했다.

그러자 의사는 ‘넘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혹시 남편이 때린 것인지’ 물었다. 가해자는 침묵으로 답했다. 의사는 진단서에 “가정폭력으로 인한 상해”라고 기재하였다. 36kg 왜소한 체구에 작은 키, 목소리마저 가냘프게 흔들리던 가해자는 누가 봐도 완벽한 ‘피해자’였다.

피해자는 이혼 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해자로부터 공갈 협박을 받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가정폭력으로 영구적인 상해를 입었다며 돈을 요구했다. 만약 돈을 주지 않으면 자녀의 학교와 주변인들에게 피해자가 가정폭력범이라고 이야기하겠다고 협박했다. 의사의 진단서가 그 증거라 했다. 

범죄자는 성별이나 외모로 판단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얼마나 고상한 취미와 성품을 가졌는지 역시 범죄자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범죄자는 오로지 그의 범죄 행동으로 판단된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런 ‘가해자다움’은 없다. 

이미선 동양대 경찰범죄심리학과 교수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법심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관심 분야는 주로 성폭력 피해 아동 조사면담과 진술신빙성 판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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