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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너머의 사회과학 위해 ‘남극 기지’를 찾아간 이유
인간 너머의 사회과학 위해 ‘남극 기지’를 찾아간 이유
  • 김준수
  • 승인 2023.07.19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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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45 인류세를 비판적으로 연구한다는 것
김준수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참여연구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나는 거대한 인류세 담론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맥락의 식민주의와 발전주의, 
그리고 냉전의 역사에서 인간 너머의 국가·생명안보·환경정책 등 
새로운 형태의 정치생태학 연구를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기후변화·상품이동·자본순환 등의 이유로 ‘종의 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교란, 영토성의 문제, 생명안보의 문제 등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정책의 필요성과 과학지식의 재구성이 요청되고 있다. 나의 연구는 인류세 현상이라는 다양한 변화에 초점을 두고, 인간 너머의 존재와 국가·제도·지식·정책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다. 

탈자연화된 이론에 대한 비판

나의 학문적 관심의 출발은 역사에서 주변화된 행위자의 서사를 발굴하고 재구성하는 데서 시작했다. 특히 한국의 발전주의 담론과 냉전의 역사에서 주변화된 행위자와 역사를 부여받지 못해 기록되지 못한 행위자를 찾아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재현하는데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과학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은 마주침을 통해 연구 주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신촌역 굴다리 밑에서 지나가던 비둘기에게 똥 세례를 맞은 것이다. 비둘기와의 갑작스런 마주침은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비둘기와 같은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의 시선이나 제도와 영역 속에서 존재하지만, 폐기된 행위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뒤로 나는 한국의 발전주의 도시화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폐기된 비둘기의 물질성과 상징성, 역사성의 변화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나의 연구 주제는 비인간 행위자들이 개입하고, 만들어낸 국가 기구에 대한 연구로 변화했다.

연구자로서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주목과 관심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에 대한 고민을 불러왔다.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 함께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비인간 행위자들이 만들어 낸 국가의 형태, 제도의 구성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 속에 나의 연구 주제는 빠르게 변화했다.

비인간 행위자가 만들어낸 발전주의와 냉전의 역사는 무엇이 있을까? 국가의 형태와 경계, 작동방식을 만들어낸 비인간 행위자는 없을까? 이런 고민의 확장을 통해 나는 인간 너머의 영토성과 생명안보, 지식생산 과정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이어갔다. 이를 통해 종 이동이 불러온 사회적·정치적·제도적 구조 변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2019년 한국에서 주요하게 작동한 두 가지 생명안보 정책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의 미국가재는 한국의 야생에서 발견돼 생태계 교란 생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 종은 오랜 시간 물생활 생물로 개량돼온 역사가 있었다. 이 종의 위험성을 강조한 보전생태학 과학을 근거로 폐기와 유통금지라는 하나의 정책으로 연결됐다. 필자는 논문에서 하나의 학명으로 포함된 종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존재론적 지위를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과학-하나의 정책이 가진 모순과 위험성을 비판하고자 했다. 
오른쪽 사진은 북한으로부터 야생 멧돼지를 매개로 남한으로 유입됐다고 추정되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을 차단하기 위한 접경지역의 방역 과정을 보여준다. 필자는 해당 논문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다종적, 종 간 관계를 밝힌 수의학, 세계동물보건기구의 자료를 통해 인간 너머의 영토성의 작동 방식과 이에 대응하는 국가의 방역망 재영역화 과정이 범하고 있는 방법론적 단종주의를 비판했다.  사진제공=김준수

사회학·인문지리학에서 채우지 못했던 갈증

그렇지만 사회과학의 연구는 비인간 행위자를 진지하게 바라보기에는 틈이 없을 만큼 인간중심적이었다. 사회과학은 복잡다단한 인간 사회의 문제를 풀어내기에도, 또 다양한 구성주의와 실재론의 문제를 드러내기에도 충분히 바빠 보였다. 이때 나의 연구 관심은 정치생태학, 특히 도시정치생태학이란 분야로 옮겨갔고, 지리학자들과의 교류가 늘었다. 인문지리학 안에서 정치생태학 분야의 이론적·방법론적 틀은 상당히 유용했다.

특히 환경 변화와 생태계 문제를 정치경제학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정치생태학의 연구 관심은 인간 너머의 사회과학 연구를 시작하기에 좋은 디딤돌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데도 사회학과 기존의 인문지리학에서 채우지 못했던 방법론적 갈증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사회학과의 방법론 훈련은 다양한 구성주의부터 비판적 실재론까지 다루었고, 연구방법은 설문지 작성부터 인터뷰, 참여관찰까지 이른바 양적 방법과 질적 방법을 두루 익히는데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인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 포착 방식은 하나의 분과 학문이 사용하는 연구 방법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었다. 비인간 행위자 중에서도 특히 생물 종에 대한 나의 관심은 기존에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던 자연과학의 연구와 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 한 종의 비인간 동식물 혹은 유기물 등을 이해하기 위해 생물학·생태학·수의학·식물학·바이러스학 연구에 대한 독해력이 필요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연구자들이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 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생태·환경·종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비와 방법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자연과학의 다양한 분과학문 속에 있었다. 이들의 방법론을 좀 더 정치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과 더불어 항상 안락의자에 앉은 사회학자가 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 은사님들의 조언은 항상 나를 바쁘게 현장으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나의 연구방법론적 경계는 더 이상 질적 연구냐, 양적 연구냐, 이 둘의 혼합방법이냐가 아니었다. 자연과학의 연구와 분석 방법을 이해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사회과학의 연구와 분석을 엮어내는 혼종적 방법론을 지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회과학자들이 사용해온 개념과 연구방법론이 오히려 강력한 인간중심주의적 접근에 갇혀버린 문제를 파고들어 자연과학의 방법과 기법을 통해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통해 생물학·생태학·환경과학 등의 언어와 방법을 적극적으로 논문에 사용하였다. 그야말로 혼종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2년 필자는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하계연구대원으로 참여해 현장연구를 진행했다. 극지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국제정치의 성격과 더불어 극지 과학 지식생산 과정 속에 포함된 다양한 규범과 의례, 그리고 지식생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당성의 정치를 관찰했다. 이 과정에는 한국 이공계의 위계적 질서, 국내·외 정치적, 규범적, 문화적 재현 과정이 포함돼 있었다. 사진제공=김준수

말로만 듣던 과학의 구성주의를 경험하다

그렇게 다소 복잡하고, 자극적인 비인간 행위자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언어와 방법으로 풀어가던 중,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자연과학의 산물 자체가 구성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것은 카이스트에 온 이후이다.

융복합연구를 위해 사회과학자와 자연과학자가 반반으로 구성된 인류세연구센터와 연구실 생활·과학기술학·환경사 등에 대한 진중하고 참신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의 몇몇 동료 학생들 덕분에 내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던 과학지식의 구성주의에 대한 인식을 재환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류세연구센터와 극지연구소의 과제로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기후변화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자에 대한 참여관찰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극지 공간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활동과 일상생활 공간으로써 과학기지에서의 경험은 과학지식 자체의 다층적 구성과 해체 가능성, 비판적 재구성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분야임을 알게 해주었다. 물론 그 과정이 생각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도교수와 인류세연구센터 구성원의 가이드와 지지는 끊임없이 물질성과 역사성 인식의 중요성을 견지하면서 구성주의와 실재론의 그 사이 혹은 이 둘의 관계에서 나의 연구를 위치시키기 위한 도전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새로운 대안적 접근 ‘비판적 인류세 연구’

나는 비인간 행위자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기존의 동물권·보전생태학·권리 담론과는 구분될 수 있는 탈식민주의·정치경제학·국제정치·영토성·생명안보·지식의 재구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인류세 담론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맥락의 식민주의와 발전주의, 그리고 냉전의 역사에서 인간 너머의 국가·생명안보·환경정책 등 새로운 형태의 정치생태학 연구를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나는 종의 이동이 불러온 국가와 사회의 다양한 교란과 불안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고 기존의 다양한 정치적·사회적·제도적·문화적·규범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대안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피상적 형태의 담론과 방법론을 넘어서 물질성과 역사성 그리고 동시대의 정치생태학적·정치경제학적 문제의 복잡한 얽힘을 풀어낼 수 있는 대안적 담론과 서사, 이론이 필요하다.

인류세의 문제가 환경위기와 기후변화에 담론 이상의 존재론적 문제를 불러오고 있다. 이는 비단 연구자 개인의 삶과 분과학문의 경계뿐만 아니라 기존의 이론적·방법론적·실천적 경계의 변화를 요구한다.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접근인 비판적 인류세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김준수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참여연구원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학·석사를,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너머의 국가론, 정치생태학, 국가-자연 관계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한국의 외래생명정치와 인간 너머의 생명안보: 붉은가재(Procambarus clarkii)를 통해 바라본 생태계 교란종의 존재론적 정치」, 「극지 심상의 변천: 미지의 땅에서 인류세 프런티어로」, 「팬데믹과 인류세 자연: 사회적 거리두기와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 「한강의 생산: 한국의 발전주의 도시화와 인간 너머의 물 경관」, <한국의 발전주의 도시화와 ‘국가-자연’ 관계의 재조정: 감응의 통치를 통해 바라본 도시 비둘기」 등이 있고, 다수의 역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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