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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동의어로서 정치학과 젠더학, 나의 위치성을 성찰하기 
이음동의어로서 정치학과 젠더학, 나의 위치성을 성찰하기 
  • 김올튼
  • 승인 2023.12.27 0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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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62 나의 젠더 정치학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예컨대 국제정치학에서 안보에 대한 주류 해석의 틀인 
현실주의 접근과 자유주의 접근은 서로 상충되어 보인다. 
그러나 두 접근 모두 기존의 안보 실천이 국민과 비국민, 
이성과 감성,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원화되고 
위계적인 구획을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변수에 젠더를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해석 틀과 지식을 젠더적이고 퀴어한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아마 이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나’가 될 것 같다. 이 글은 젠더 정치학 연구의 현황과 한계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 정치학자로 정체화하고, 젠더 정치학을 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내가 젠더 정치학을 어떻게 전공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페미니즘과의 만남이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때였다. 남중과 남고를 다녔던 나는 대학에 와서 페미니스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사회 현상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과 해석을 접할 기회가 그전에는 전혀 없었다. 

젠더 렌즈를 통해 사회를 해석하는 것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스트 덕분이다. 동아리에서, 과에서 만난 페미니스트를 통해 성별화된 권력관계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규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성별화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맥락에서 내 위치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내가 무고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하지만 변화의 과정은 드라마틱하기보다는 ‘시나브로’에 가까웠다. 페미니스트와의 일상적 대화, 정기적인 여성주의 세미나, 여성 단체 자원 활동 등을 통해 정치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폭력에 대해서, 위계에 대해서 점점 (재)해석하게 되었다. 

여성학 수업 시간에 배운 ‘평등의 감각’

내가 젠더 관계 변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페미니스트는 여성학 선생님들이었다. 운 좋게도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여성학협동과정이 있었다. 협동과정생은 아니었지만, 성의 역사, 페미니즘 철학, 전쟁과 여성 등 다양한 페미니즘 수업을 매 학기 찾아 들을 수 있었다. 여성학협동과정이라는 제도적 환경이 없었더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백래시로 인해 많은 학교에서 여성학협동과정이 사라진 상황이다. 사회 전반적인 성평등 의식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이를 촉진하는 제도적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만큼 여성학협동과정은 우리 대학과 사회에 꼭 필요하다. 여성학 수업 시간은 젠더화된 권력관계를 심문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두가 존중받고, 안전하고, 평등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매 수업 시간 느꼈던 ‘평등의 감각’은 아직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여성학 선생님들이 몸소 보여준 존중과 평등의 실천은 여성학이 다양한 위계와 권력관계에 대한 성찰과 저항을 바탕으로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젠더 정치학을 더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스웨덴과 독일에서 젠더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정치 현상의 복잡한 층위를 젠더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인종·젠더·계급·민족·섹슈얼리티와 같은 다양한 권력축이 어떻게 얽혀 특정한 효과를 생성하는지를 분석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이주 여성 시민권과 관련해서 공식적·비공식적 제도 사이의 간격과 성별화된 인종주의의 작동 방식을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적대적 상황에서도 성소수자 친화적 정책 결정을 가능케 하는 힘과 조건을 연구했다. 스웨덴에서의 연구가 기존 시민권 이론을 젠더링하는 과정이었다면 독일에서의 연구는 기존 주류 정책 과정 이론을 퀴어링(queering)하는 과정이었다. 

젠더적·퀴어한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이 두 연구를 하면서 공통으로 깨닫게 된 점은 제도와 제도적 변화의 사례로 이주 여성 시민권이나 성소수자 정책을 다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젠더적 시각, 혹은 퀴어한 시각에서 제도와 제도적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자 로벤두스키에 따르면 ‘좋은 페미니스트 사회과학’은 ‘좋은 사회과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젠더학과 정치학은 이음동의어라 부를 수 있다. 젠더적 관점 없이는 시민권·국가·정책·안보·사회 운동 등 다양한 정치 현상을 타당하게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예컨대, 국제정치학에서 안보에 대한 주류 해석 틀인 현실주의 접근과 자유주의 접근은 상충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접근 모두 기존 안보 실천이 국민과 비국민, 이성과 감성,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원화되고 위계적인 구획을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변수에 젠더를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해석 틀과 지식을 젠더적이고 퀴어한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최근에는 신제도주의를 젠더링·퀴어링하는 페미니스트 제도주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치학·행정학·정책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신제도주의 이론은 제도의 형성·변화·지속에 있어 통찰력 있는 설명을 제공해 왔다. 

올 여름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연구소에서 ‘페미니스트 제도주의를 묻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출처=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 연구소 

페미니스트 제도주의는 이러한 신제도주의 접근과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통합하여 젠더·정치·제도를 더욱 타당하게 설명하려는 접근이다. 특히 2006년부터 페미니스트 정치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페미니즘과 제도주의 국제 네트워크’(Feminism and Institutionalism International Network, FIIN)를 결성하여 페미니스트 제도주의를 이론화하기 위한 연대를 구축해 오고 있다. 

이들의 관심 분야는 정치 대표성, 연방주의, 거버넌스, 민주화, 가족 정책, 성별 할당제, 복지국가 등으로 다양하다. 공통으로 신제도주의 이론이 성별화된 정치제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으며, 동시에 몰(沒)성적인 신제도주의 접근을 젠더 관점에서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있다.

성평등 제도 이후의 제도화 과정에 주목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제도주의에서 제도는 어떻게 개념화할 수 있을까? 보통 신제도주의는 제도를 행위성에 영향을 미치는 게임의 규칙으로 정의한다. 페미니스트 제도주의 역시 이러한 신제도주의 입장에 기반하여 공식적·비공식적 규범과 실천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게임의 규칙에 성별화된 권력이 작동한다는 점에 착목하여 제도를 젠더가 구성되는 실천으로 개념화한다. 이러한 점에서 제도는 이원화되고 위계화된 젠더를 지속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고 대항 담론을 구현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젠더화된 권력관계의 변혁을 지향하는 성평등 제도가 만들어지더라도 이것이 곧바로 보편적으로 수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평등 제도 형성 이후에도 이러한 제도가 취해야 할 형태와 수행해야 할 기능을 두고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경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성평등 제도에 대한 저항은 새로운 규칙 집행의 부재, 전통적인 관계와 규범의 재강조, 새로운 제도에 대한 망각, 새로운 제도에 대한 부분적 비준수 전략, 주요 행위자들이 새로운 권한을 완전히 활용하기를 꺼리는 것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평등 ‘제도 이후의 제도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2012 시행)는 개신교 우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사유로 명시한 성공적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면 차별금지사유를 어렵게 명시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명시화 이후에 실질적 제도화로 직결되기보다는 지난 10년 동안 이 조례는 성소수자 인권 제도에 대한 제도적 저항 및 부인 시기, 성소수자 인권 제도의 조용한 시행 시기, 성소수자 인권 제도의 명시적 집행 및 위기의 혼재 시기를 거쳐왔다. 기존 이성애 규범적 헤게모니 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더라도 이것이 하나의 지배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담론 구조화 없는 담론 제도화’라는 취약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평등 정책과 같은 공식적 제도 성립과 관계된 ‘도구적 목표’ 외에도 규범과 정동과 같은 비공식적 제도의 변화와 관련된 ‘표현적 목표’의 성공이 사회운동에서 중요함을 시사한다.

차별금지사유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삭제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개정안을 반대하는 청소년 성소수자 1,232인의 기자회견이 2014년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열렸다. 출처=비마이너

성평등 제도, 또 다른 지배 규범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성평등 제도가 만들어지더라도 이것이 또 다른 지배 규범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 교육청 민주시민생활교육과에서 발간한 「인권친화적 학교 기숙사운영 길라잡이」(등록번호: 서울교육 2022-35)의 경우 성별에 따라 통금시간을 달리하는 것은 인권침해 사례로 규정하고 있지만 성별 이분법적인 기숙사 운영은 문제화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접근은 한편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적 통금시간을 문제로 규정하지만, 여성과 남성의 이원화된 범주는 오히려 지속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문제 재현에서 무엇이 말해지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지가 중요한 이유다. 이렇게 ‘표시도 남기지 않으면서’ 인간됨의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문제화하고 교란하는 과정이 퀴어한 제도화 과정일 것이다. “삶의 가능성의 조건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을 때 제도화는 불온한 것일 수 있다.   

특권적 위치에서는 특권이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잘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시스젠더 이성애 남성이라는 위치성으로 인해 잘 인식하지 못하고 예민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고백하자면 그래서 늘 연구에 있어서 자신감이 없는 편이다.

아마 이러한 자신감 없음은 시간이 꽤 흘러 내가 중견 연구자가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신감 없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의 자원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바람이다. 나의 위치성을 성찰하고, 다른 이의 관점과 해석, 경험에 귀를 여는 자세로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자신감 없음은 내가 젠더 정치학을 하기 위해 잃지 말아야 자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의 위치성을 물으면서 이음동의어로서 젠더학과 정치학 하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김올튼 전남대 5.18연구소 전임연구원
젠더학과 정치학은 이음 동의라고 생각하면서 젠더 정치학을 공부해 왔다. 스웨덴 룬드대에서 젠더학(정치학 전공) 석사를 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The Discursive Struggle over LGBT Rights in South Korea: The Politics of Pro-LGBT Policy Adoption in a Hostile Environment」(2022)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 5·18연구소 전임 연구원으로 있으며 민주·인권·평화를 상징하는 오월 정신의 퀴어링/젠더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연구소(FIPS)에서도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성소수자 인권 제도 이후의 제도화 과정: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사례를 중심으로」(『여성학 논집』 40(1), 2023)가 있으며 제도, 정치, 젠더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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