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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우리는 유교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만능론과 무용론을 넘어서
  • 이상민
  • 승인 2024.02.22 08:59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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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66 조선시대 유교는 무엇이었나 
이상민 연세대 강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유교는 구속인 동시에, 
해석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틀이기도 했다. 
지식인의 토론과 경전 해석을 통해 
유교는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재구성됐다. 
조선에서 유교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실체였다.

흔히 조선시대는 유교와 연결된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유교적’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어딘지 강경하거나, 엄격한 도덕률을 고집하는 태도를 두고 ‘조선시대 같다’거나 ‘유교적’이라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유교를 연결 짓는 통념의 내용에 대해 막상 제대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이 유교 국가라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유교 국가가 되었을까.  흔히 말하듯,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적 습속을 배척하고(실제로는 다 배척하지 못했다), 적장자 상속을 제도화하며(실제로는 한참 뒤에나 가능하며,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지배층이 유교적 텍스트를 달달 외우는 것이 ‘유교 국가’의 기준인가?(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고려도 유교 국가다.)

유교는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라는 물음

이도저도 복잡하니, 그저 폐쇄적이고, 차별적이고, 여성을 핍박하고, ‘꽉 막힌’ 것이 유교라는 설명이 퍼져 있다. 유교에 그렇게 깊이 심취한 나머지 조선은 망국에 이르렀다는(!) 식으로 생각이 귀결되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예전부터 그런 통념을 비판해왔다. 연구자들은 대중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유교가 낙후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소수에게는 조선 유학자들이 지녔던 진보적 성격이나, 조선이 지녔던 문화적 역량도 상당히 알려졌다. 하지만 ‘유교’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라는 식의 갑론을박으로는, ‘유교가 무슨 일을 한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보니 최근 조선시대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교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데 설명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나 성리학을 도외시하는 것이 능사일까. 조선 지식인의 사고 체계에서 유교나 성리학이 가진 비중은 상당히 크다. 

그렇다면 조선을 이해하는 데 유교나 성리학을 의미있게 관련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유교 텍스트를 조선시대 지식인이 어떻게 읽었던가를 추적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렇게 독해된 유교적 텍스트를 통해 수립된 이상이 제도로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선의 지배층이 지배를 위해 불가피하게 도입했던 형벌과 그 형벌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덕치의 이상을 절충시키는 방안을 어떻게 고안했고, 그 절충 방안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 주목하기로 했다. 그것이 나의 박사논문 내용이 되었다. 

이상론자의 ‘덕치’와 현실론자의 ‘형벌’

고려 말 유학자(성리학자)들은 자신의 시대를 ‘인륜이 파탄’된 시기로 규정하고 파탄 난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크게 노력했다. 고려 말 유학자들이 그런 노력의 과정에서 사회 전반에 관철하고자 했던 이상은 ‘덕치’로 요약된다. 덕치란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믿는 윤리적 본성을 각자 잘 가꾸게 하여 가족-사회-국가에 이르는 질서를 재구성하고, 폭력이나 강제를 통해 질서를 세우는 방식은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상만으로는 국가 제도나 정치 이념을 덕치에 맞춰 정당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덕치’의 이상을 추구한 유학자 정치인들은, 민간의 질서를 통제하기 위해 ‘형정’이란 것도 아울러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당화해야만 했다.

물론 ‘성인도 형벌을 폐할 수 없었다’는 유교적 텍스트 상의 명제가 통용되었던 만큼, 형벌의 필요성은 유교 지식인들에게 제한적으로나마 긍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유학자들 사이에서 덕치의 이상이 강하게 제기되었기에, 덕치의 한계를 암시하는 형정 사용의 현실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여말선초 유학자 지식인들은 아래의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했다. 국가의 공기(公器)로서 형벌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덕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덕치의 수단인 교육이나 교화가 ‘무지한 민’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지한 민’ 중에 도적이나 윤리 강상범이 생겨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장기적으로 그런 범죄를 줄일 수 있을까? 

세종대 『삼강행실도』의 편찬은 진주 사람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에 대한 대처 과정에서 이뤄졌다. 허조는 김화와 같은 인물이 더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더 강한 법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김화 본인에 대한 처벌에 동의하면서도, 후속 조치로 법적인 수단 대신 교화서의 편찬·보급을 택했다. 허조와 세종은 존속살인이 엄중히 다뤄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처벌 또한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했지만, 그 대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유교 텍스트 안에서 절충안을 찾다

이런 질문은 ‘덕치를 우선시하고 형벌을 최소화한다’는 원론만으로 답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긴 토론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의 국왕이나 유학자 관료들은 각자가 주목한 유교 텍스트의 구절을 근거로 들어 각양각색 주장을 폈다. 주희가 지은 저술들에서 육형(肉刑)을 옹호한 부분에 착안하여, 도적을 방지하려면 도적을 용서할 것이 아니라 다리 힘줄을 끊는 등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세종과 같은 이는 『근사록』에서 죄인이 스스로 뉘우칠 수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개념을 끌어와서 형벌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양 극단적 주장 사이에서 여러 절충안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토론은 세종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세종의 ‘애민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파격적인’ 주장들도 이런 토론 과정에서 나타났다. 세종은 백성이 무지한 까닭에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백성에게 형벌을 가하기보다, 백성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 대의 토론에서 제기된 주장 중 일부가 제도로 정착된 것은 성종 시기였다. 성종과 그 시기 유학자 관료들에게는 세종만큼의 ’파격‘적인 발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종은 죄인에 대한 처벌 기준이나 관용을 베푸는 기준, 민에 대한 윤리 교육의 방안 등에서 체계화된 틀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한 체계화의 과정은 민의 입장을 도외시하고 지배의 효율성을 기했다는 점에서 강압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처벌의 임의성을 상당히 제약한 점에서는 제도를 체계화시켰다고 볼 만한 면도 있다. 성종 시기에 나온 대안들 역시 모두 유교적 전통 내에 있는 텍스트 해석을 근거로 하였음은 물론이다. 

유교, 구속인 동시에 자율성의 언어

여말선초 유학자들에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는 방법은 모두 유교적 텍스트의 범위 내에서 구상되었다. 유학자들은 유교적 텍스트를 근거로 한 덕치의 이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형정 사용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자는 유학자들의 의견도 유교적 텍스트를 근거로 할 때 등장할 수 있었다. 덕치를 강조하든 형정을 강조하든, 어느 입론이든 유교 텍스트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덕치의 이상을 강조하는 이상론자와 형정 실시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현실론자 간의 절충이 제도적으로 귀결된 성종 대까지의 과정을 ‘조선이 국가적으로 유교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각자 다르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유교적 텍스트에 근거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열망이 조선 초 개혁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이상 사회의 모습은 반드시 유교적 텍스트에 근거해야 했다.

하지만 유교적 텍스트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덕치와 형정을 어떻게 절충할지에 대한 토론도 이뤄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 지배층에게 유교는 구속인 동시에, 해석의 자율성을 시험하게 하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언어적 틀이기도 했다. 거꾸로 지식인의 토론과 경전 해석을 통해서 유교는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재구성됐다. 조선에서 유교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실체였다.

박사논문에서 이런 합의가 성종 시기에 접어들어 일단락되는 시기까지 다루었다. 성종 시기에 이뤄진 합의는 16세기의 사회적 변화를 맞아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앙 관료가 주체가 돼 제도 개편에 집중했던 15세기의 흐름과는 달리, 지방 사회를 직접 바꾸고자 한 또 다른 움직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를 통해 더 밝혀보고자 한다.

이상민 연세대 강사
2023년 연세대 사학과에서 「여말선초 덕·형 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조선의 ‘유교화’를 둘러싼 정치·사회·사상적 긴장을 다각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최근 발표한 주요 논문으로는 「고려말 무위(無爲)의 이상정치 지향과 유교적 형정론」 「조선 초기 지방지배와 향촌교화에 대한 연구와 쟁점」 「15세기 초 율문 교육과 형률적 교화 모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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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4-02-23 00:46:45
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 유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윤진한 2024-02-23 00:45:55
한국헌법 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하고,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일본의 종교기준을 적용하는게 맞지않음.@한국영토에 주권없는 패전국 잔재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 일본 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

윤진한 2024-02-23 00:44:50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그러나 세계사로 보면, 가톨릭이라는 세계종교는 너무 세계인에 일반화되어서, 국사적개념과 병립하여, 세계사적 개념으로,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에서, 국제관습법상 세계종교 가톨릭의 자격으로 예우하는게 적절함. 일본식 개념으로, 일본 국지신앙인 일본 신도(일본의 국교), 불교, 기독교의 위상을, 한국에 적용할수는 없음.

그리고 한국과 바티칸시티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윤진한 2024-02-23 00:44:11
24절기,문중제사.가족제사!
@일제 강점기에 강제 포교된 일제강점기 포교종교들이 종교협의회나 어떤 모임 가진다고, 종교주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그리고 주권없이, 일본 강점기 강제 포교종교도 같이 믿는 현상이 생겨남.@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

윤진한 2024-02-23 00:41:20
헌법이나, 국제법, 한국사, 세계사의 자격은 대중언론.입시지의 준동을 아랑곳 하지 않는 특질을 가졌습니다.또한 주권.학벌이 없는 서울대와 추종세력의 약탈을 인정해 줄수도 없습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슨학과든지 Royal 성균관대(국사 성균관자격), Royal 서강대(세계사의교황반영,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성균관대(양반대학)와 서강대(가톨릭계 예수회의 귀족대학)만 Royal대며, 일류.명문임. 그리고 주권.자격.학벌 없는 경성제대 후신 불교 Monkey서울대(일본 불교僧 점쇠 천황이 세운 불교 마당쇠 대학). 한국에 무종교인은 없습니다..5,000만 모두가 유교국 조선의 한문성명.본관 가지고, 유교교육 받고,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 및 각종 명절, 24절